등산

가을빛 가득한 산 적상산에서

no pain no gain 2007. 5. 28. 14:45

가을빛 가득한 산 적상산에서

 

 

새벽 안개가 가득한 고속도로 희뿌연 어스름을 뚫고 남으로 달려갑니다.

비상등의 빨간 두 점만이 안개 속을 점멸하듯 반짝입니다.

 

안개 그 보이지 않는 형체의 미망 속에는 허여 멀건 한 공포의 뭉텅이와 건너갔을 때의 새로 나올 환상의 세계가 기대되는 양면성을 지닌 또 하나의 섬이다.

 

달리던 차량이 멈칫거리는 상황을 판단하고 모두들 안전벨트 점검부터 한다.

오늘의 기사님 신경 좀 쓰이겠어요?

 

 

고속도로를 벗어나와 옛날 시골길에 아스발트 포장만 입힌 구불구불한 길을 스리슬쩍 어물쩡 잘도 넘어간다.

 

한가한 시골의 전형적인 들판에는 한창 추수가 바쁜 일손들이 콤바인을 끌고 논 바닥을 수놓듯 돌아가면서 볏 가마를 떨구고 간다.

 

잎 떨어진 감나무 붉은 가을을 매달고서 느긋한 가을 햇살 아래 졸고, 언제 타작을 했는지 콩이며 들깨 말리는 모습이 이제 막 어머니가 사립을 열고 손을 털고 나올듯한 정겨움이 듬뿍 묻어난다.

 

 

서창마을 주차장에서 모인 일행들은 저 멀리 히말라야에서 정상을 향해 땀 흘리고 있을 일부의 임원진들의 빈 자리가 아쉽기도 했지만 진입로를 넓게 보수해서 탐방로로 연결해둔 물 맑은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를 벗삼아 줄을 지어 산행을 한다.

 

제법 굵은 다래넝쿨이 지리산 자락이 가까워 졌음을 알리고 등고선이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 쉽게 지그재그로 넓혀둔 길을 따라 오르다 보니 어느 샌가 딱 막아선 장도바위.

 

그곳에는 최영장군이 제주도를 토벌하고 개경으로 돌아가던 중 산이 너무 붉고 아름다워서 오르다 보니 암벽이 가로막아 한 칼에 장도를 내리쳐 둘로 갈라져 그 길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담긴 곳.

 

그래서 보니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한 길이 나 있다.

이미 꿈의 시체가 되어버린 수북하게 쌓인 낙엽을 밟으며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한 푹신함이 배어 나와 주저앉으면 방석처럼 느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늘씬하게 자란 활엽수 자연림의 틈을 뚫고 사각으로 비치는 햇살은 이미 붉고 노랗게 혹은 가을 잎 사이로 푸른 이파리들이 뒤 섞여 또 다른 세계를 그려낸다.

 

땀을 훔치면서 잠시 쉬어간다.

그 동안 산행을 게을리 했던 내무장관은 한걸음 한걸음이 마치 춘향이 걸음처럼 조심스런 행보. 무척 힘겹게 보인다.

한참을 가다 보면 저 만큼 오고 다시 기다렸다가 함께 가기를 수 차례 어느 순간엔가 앞을 가로막은 산성 후문.

 

최영장군의 건의로 쌓았다는 성은 거란의 고려 성종과 현종 때의 3차례 침입과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의 탁월함이여!

 

 

성안은 마치 평지 같은 낙엽길이 이어지고 군데군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고목들은 인생 학습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쯤 자나니 삼거리. 좌측 길을 따라 지나면서 보니 온통 단풍나무 , 갈참나무, 싸리나무  숲 속에 계절을 지나가는 마른 잎 냄새가 오히려 향기로운 기분마저 얼싸 해 온다.

600여 년 전엔 이런 산길을 말갈기 휘날리며 내 달렸을 그 기상이 숨죽여 들어보면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어느덧 정상.

탁 특인 사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마치 두 마리의 거대한 용이 토굴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형상의 구멍 뚫린 터널이 보이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파란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인 전형의 가을 날이다.

 

 

아직 식사는 이르고 간식을 지난번 만든 송편으로 먹고 다시 하산 길. 안렴대에 도착하니 1034m 의 적상산이라 부르는 호칭이 온 산이 빨간 치마를 입은 듯 하다는 뜻을 알 것 같다.

 

어린 시절 캔버스 위에 아무런 생각 없이 이제 막 새로 산 물감을 아낌없이 풀어서 화폭에 짜 둔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산자락 절벽에 매단 주변 나무 숲은 온통 단풍나무 붉은 빛 향연으로 안렴대의 비경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잠깐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어젯밤 꿈 속에서 누군가 불러댄 그 손짓이 바로 이런 가을 산으로의 초대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산이 부를 때 부지런하게 다니라던 선배님의 말뜻을 알 듯도 하다.

 

 

내려 선 곳이 바로 호국도량으로 알려진 안국사.

전국의 어느 사찰이나 그렇듯이 지금은 한창 불사가 이루어져 증축과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을 겪고 있다.

 

약수를 마시면서 감로수의 달콤함과 추억을 담고 내려가는 길.

아쉬움이 남는다면 비포장 길을 포장해서 흙먼지 나지 않는 것은 좋지만, 그 길로 매연을 내 뿜으며 달리는 차량과 뒤섞여 내려갈 바엔 차라리 산길이라도 새로 내서 안전한 산행이 되었더라면 하는 미련이 남는다.

 

산 구비를 돌아 내려가는 길은 중앙선이 아니라 반대편 차선까지도 모두 차지 해야만 꺾어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위태롭게도 보였지만 베테랑 기사의 그 믿음직스런 솜씨로 마치 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 스리슬쩍 아리랑 고갯길을 미끄러지듯 내려온다.

 

언제부터 무주에 그리 많은 사과 밭이 생겨났는지 알지 못하지만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를 매단 과수원들이 여기저기 이어 붙인 듯 널려있고 더러는 사과 밭 사이로 배와 포도와 인삼 밭이 함께 펼쳐진다.

언젠가는 무주특산이 이런 것이 주종을 이루는 날이 올련지 기대되는 상황이다.

 

산 어귀에는 언제 누가 심었는지 모를 감들이 널려있어 마음까지 풍요로운 가을을 만끽하며 산행을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