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 열애. 황석영 作. 1988.

no pain no gain 2025. 5. 15. 13:08

📚 열애. 황석영 作. 1988.

작가로 알려진 뒤. 오래전에 조금 다니던 학교의 동창생이라는 전화가 온다. 만나서 도와 달라고. 뭘. 그냥 만나자고 한다.마흔살 무렵 끌려간 명문고 동창모임.

종친회가 됐던 향후회가 됐던 이맘때의 모임이랑 대개는 비천 가진 사람들의 능력을 확대하고 교환하려는 의도가 본래의 목적보다 더 확실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더구나 어려서부터 계속적인 경쟁의 관문을 통과한 자들끼리의 모임은 이런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하게 될까. 거기서 소 생산자나 중소기업인들은 같은 업종의 친구들을 찾아내 옛날 서양식의 프리메이슨 같은 동업자 소모임을 만들기도 하고, 대재벌의 이사들은 은행 지점장이나 이사들과 자금의 유통에 대하여 서로 협조를 당부하며 또한 군인과 관료와 법조인들은 이들 사이에서 견고한 유대교류가 긴요하다는 점을 서로 인식시킨다. 그들은 대개가 관리 계층 이거나 진작 독립해서 자기기 업체를 끌어가기도 하고 전문가이며 기획자이고 그가 관여하는 부분에서 강한 영향력의 행사자이기도 하다. 그들은 따로의 부부동반의 각종 모임을 갖고 월별로 서로 초대하기도 하며 해외망을 연결하기도 하고 감사장이나 기념패를 만들어 주고받는다. 선후배가 어울려 테니스와 골프 동호회를 만들고 부부동반 헬스클럽 모임, 여행 모임, 문화행사 모임, 콘도 모임, 휴가 모임, 부동산 모임, 거시기 모임 무슨 모임해서 자꾸 새끼를 쳐나가고 이 모임들은 다시 큰 모임을 이루면 혼합된다. 물론 모두가 능력자이고 실력자는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건 이맘때의 동창회란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선별되게 마련이므로 다 그만그만한 처지와 끗발들을 비교적 대등하게 만나서 우정을 제삼 확인하게 된다. 여자는 또 여자끼리들끼리 남자들과 맞먹을 만한 학교의 학력과 연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차츰 분명해지고 있는 요즘 세상에 힘이 힘의 토대이면서도 서로를 다시 반복해서 만들어내는 질서의 틀이다. 역사와 사람의 본질은 변화에 있다는 소리는 어느 교과서에 나오던 말인지 똑같은 틀 속에서 변화의 힘이 나오지 않고 정반대의 것에서 비롯된다는 말은 또한 어떤 경전에 써 있었을까.

한참 풋고추와 된장에 깡보리밥 식당이 도심지에서 번진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일종의 허기에 대한 허기였을 것 같다. 아 사랑, 그런 게 있기는 한가. 언젠가 시골 청년에게서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그의 고향에서는 도무지 여자를 구할 길이 없어 흑산도까지 갔단다. 흑산도에는 파시를 따라 들어갔다가 소개비요, 옷값이요 밥값이요 빚 때문에 꼼짝없이 잡혀 있는 아가씨들이 많단다. 거기서 눈매 서늘하고 건강한 아가씨 하나를 찾아 발동선에 싣고서 달아난다. 부부가 될 상대를 술자리에서 만날 수는 없어 친구끼리 품앗이로 서로 빼어내어 짝을 지어준다고 했다.

그래 결혼하여 부부가 되어 산다는 건 우리 같은 자들에게 어떤 일일까. 결국 결혼은 겉으로는 온갖 문화적 장치로 위장되어 있지만 물건들이 만든 물건의 산물이고 우리가 어려서부터 훈련받아온 계급적 이해 표현 임을 피할 수가 없다. 우스갯 노래처럼 짱구 아버지 짱구, 짱구 아들짱구, 짱구 남편 짱구, 짱구 마누라 짱구 이다. 그래 이 삶의 삭막함은 우리가 자초한 징벌로서 그 긴 그림자를 내려뜨리고 저 앞에 뻗어 있다. 서로 고만고만하게 주장하고 용납하고 물러서고 그러고는 함께 상실해 간다. 야간학교 아이들 식의 노골적 표현을 억제되는 게 아니라 가뭄에 강처럼 증발해 가는 것이다. 나중엔 생활용어 몇 마디와 아이들에 대한 질문 응답 몇 가지가 남는다. 저 세월 속에는 부동산, 동산, 통장, 고지서, 영수증 같은 것들만 잃어버린 시간의 징표로써 남는다. 흑산도를 탈출하는 것 같은 열정은 우리에게는 없지. 전에 잃어버리고 축소된 꿈만큼만 우리는 서로 타협하지. 미칠 듯 뜨거운 사랑, 그런 건 벌써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내 부탁 좀 들어 다오.
가방을 만들어 수출해서 좋은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도피 중이고 빚은 잔뜩 짊어지고, 노임채불로 고발됐고, 내 앞으로 남은 건 고물차 한 댄데. 서울 교외 경기도 어름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자취를 하고 생업은 자가용 영업 운전사다.
아내와 두 딸이 별거 중인데 글을 잘 쓰는 니가 설명을 잘해서 다시 합치도록 도와달라는 이야기다.

이혼서류를 챙겨온 아내. 협상은 결렬된다.
그리고 다음주에 온 전화에서 다시 합치기로 했다고 한다.

정말. 열애라는 것이 있기는 할까?
결혼에 대해서, 인간과 인간, 남과여의 운명적인 만남은 뭘까를 생각해보게하는 시간이었다.

2025.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