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 가객. 황석영 作. 1975.

no pain no gain 2025. 5. 13. 13:29

📚 가객. 황석영 作. 1975.

수추(壽醜)라 불리는 가객(歌客)과  문둥이 깨꾸쇠의 만남. 다리아래 자리잡고 동냥을 얻어 먹고사는 깨꾸쇠는 어느날인가 흘러들어온 추한 모습의 거문고를 메고 찾아와 노래를 부른다.

"이상한 가락이 내 어깨 위에 미풍 같이 나부끼며 얹히고, 다시 목덜미로 깊숙이 꽂히다니 정수리에서 발뒤꿈치를 뚫고 들어와 맴도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나직하고 힘찬 목소리가 가락 위에 턱 걸쳐서는 이 싸늘하고 구죽죽한 저자를 따뜻하게 데우는 것만 같았다. 나만 일어섰는가? 아니다. 내가 뒤가 급해진 느낌으로 안달을 온몸에 싣고서 다리로 올라갔을 때에, 저자의 술집 창문마다 가게 반지문마다 사람들의 머리 하나둘씩 끄집어내지는 중이었다. 다리 위에서 비렁뱅이 가객은 거문고를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서 고개를 푹 숙여 머리가 없는 자처럼 땅속에 소리를 심고 있었다. 술 먹던 사람들과 수다쟁이 떡장수 아낙네며 나들이 나온 처자들이 모두 한두발짝씩 모여들어 다리에는 음율에 끌린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한 곡조가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제각기 허리춤을 끄르고 돈을 내던지는 것이었다. 돈이 떨어지는 소리가 잦아질 제 나는 새암과 선망으로 이를 악 물었고 다음에는 저 신묘한 소리로 돈을 벌게 하는 거문고를 박살내 버리고 싶었다"

얼굴을 들어라.
"나는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해 가동했을 때처럼 속이 뒤틀리고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가객은 이 세상에서는 어디서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어났는데 가객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그 더러운 얼굴은 더욱 흉하게 일그러져서 가락의 신묘한 아름다움은 그 추한 얼굴에 씌워 사그라지고 말았다. 눈도 코 도입도 제자리에 붙어 있건만, 어쩐지 얼굴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깊은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증오는 곧 심한 역증이나 게끔 했다. 사람들은 일찍이 노래 감탄한 것을 다 잊어버리고 더럽게 나타난 가객 의 용모에 불 같은 증오가 일어나 더 이상 근처에 서 있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돌팔매를 하고 던져 주었던 돈을 찾아갔다.
"내 이름은 스스로 지어 수추라고 한다. 너무 오랫동안 신묘한 가락을 찾아내느라고 이제는 내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내 본명이 무엇인지, 내 부모는 누구인지, 내 나이는 얼마인지, 내 친구는 누구였는지, 내 동네 사람은 어떠했는지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드디어 가락을 찾아내고 내 노래를 완성했다. 그런데...... 완성하자마자 나는 내 얼굴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점점 수척해지고 쇠약해져서 죽고 만다. 그러나 그러니 나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으로 가서 노래를 부를 테다. 수추는 돌로 맞은 상처 때문에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일어섰다. 처음처럼 거문고를 등 뒤에다 엇비슷 걸쳐 메고는 그를 저주했던 저자를 떠나 수추는 강을 건넜다. 강 건너편 사원 빈터에는 사람이 살지 않기 때문에.

절의 계단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그의 나직하고 힘차면서 구슬픈 노래가 음절마다 살아서 뛰는 고기의 꼬리처럼 펄떡이는 생명을 지닌 거문고 소리가 빈 사원에 널리 퍼지고 널리 퍼진 소리 들은 광야 가운데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새들은 일시에 울음을 그쳤고, 맹수들은 포효를 잊었으며, 나무숲들은 가지를 떨도록 바람에 내맡기지 않고서 오히려 바람과 타협하여 숲의 소리마저 잠잠해진 것만 같았다. 새들이 깃을찾는 대신에 사원의 돌담과 지붕과 마당 위에 가득히 내려앉아 그의 노래 소리를 들었다. 수추는 물가에 앉아서 제 그림자보다 더 못한 용모의 실상을 비춰보면서 울었다. 한 추악한 사내가 구름을 머리에 이고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추는 생각했다. 그가 제 음율에 도달했을 적에도 시냇가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가락이 그의 손끝에서 울려져 퍼졌을 순간에 그는 물속에 떠 있는 한 범상한 사내를 발견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아무도 찾아와주지 않는 훤한 대낮에 혼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노래가 이제 막 거문고 가락에 얹히려는 참에 줄이 탁 끊어졌다. 이 끊긴 줄이 내어놓은 무참한 소리가 그의 노래를 산산이 으스러뜨리고 말았으며, 그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거문고를 계단 위에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자르릉,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악기가 부서지고 그의 노래 마저 함께 부서졌다.

물을 마시려고 시냇물에 구부렸을 적에 수추는 또 다른 얼굴을 만났다. 그의 눈은 삶에 경이로움에 가득 차 있었고, 그의 입은 웃고 있었고, 뺨에는 땀이 구슬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는 모든 산 것들이 그러하듯이 만물의 소멸에 대하여 겸손하였다. 그가 자신을 추악하게 본 것은 그 마음이 자기 일을 자만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노래는 그의 생처럼 절대로 완전함에 도달하지 않는 것이었다. 남이 자기를 보고 까닭 없이 미워 함을 두려워하기 전에, 수추는 저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쁜 마음을 일으키고 사랑하는 마음이 일도록 다시 살아야 함을 느꼈다. 수추는 부서진 악기 조각들을 주워 모아 불을 살랐다.

수추는 강을 건너 저자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날마다 나를 다리 밑에 남겨두고 저자로 나가서 일을 했다. 나룻가에에서 그가 짐을 부리거나 수레를 끄는 일을 해서 떡과 고개를 사들고 돌아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또한 저녁마다 아픈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잔치가 있는 집이나 슬픈 일이 일어난 집에 찾아가서 주인께 공손히 청하고 조심스럽게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었다. 그의 노래는 아늑하고 힘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따뜻한 정과 말할 수 없는 용기를 돋아나게 했다. 수추는 제 추했던 얼굴을 이제는 모두 잊었다. 물 위에 떠오른 제 모습이 자기가 아니라 헛된 생각을 모두 사그라진 것이다.

저자의 거리잔치에 수추의 노래를 청했고, 노래를 위해서 오동나무를 원했고, 나무를 다듬어 거문고를 만들었다. 그가 시험 삼아 줄을 퉁퉁 퉁겨내니까 물방울 하나가 똑 떨어져 폭우가되고 벽력이 치면서  강줄기로 합치고 폭포가 되어 무한히 큰 물에 출렁거리는 소리로 변하는 것이었다.
수추는 사람들의 구름 속에 앉아 조용히 노래를 흘려보냈다. 그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고 힘을 솟구치게 해서 살아 있는 환희를 갖도록 했다. 그의 얼굴은 사람들에게 무언지 모를 믿음을 전파시켜주는 것이었다. 그의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몸짓에서 몸짓으로 퍼져나가 모든 사람들이 목청을 합하여 찾아가 떠나가도록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끊이지 않고 노래는 계속 되었다.

장자는 수추를 잡아와 노래를 그만두거나 떠나라고 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악기를 부수고, 감옥에 가두었으나 날마다 새로운 노래를 했고 누구나 따라불렀다. 혀를 자르고, 목을 치고, 장대에 효수 되었으나 사람들은 더욱더 수추가 남긴 노래들을 불렀다. 여전히 불려지고 죽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