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인1 중에서. 상상속에 외출. 황석영 作. 2017.
공주교도소에 이감생활중에 국제 인권단체들이 요구하고 항의한 가운데 제소자에게 글을 쓸 권한을 주었다는것을 면회객을 통해서 알게된다. 하지만 사전허가와 검열등을 통해서 통제한다는 것을 알고 포기한다. 집필권을 준다는 발표는 외부에 보여주기 위한 쇼에 불과했던 것.
징역의 절반은 '먹는 문제'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재소자의 불만 가운데 대부분은 식사와 매점의 구입 물품에서 시작된다. 처음에 식구통으로 밥이 들어올 때마다 목이 매었다 마치 사육당하는 짐승꼴로 세상이 밑바닥에 처박힌 느낌이 들어서 이렇게라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게 아득하고 지겨웠다. 당시의 재소자의 식비는 연료비를 포함하여 하루에 천원이 못 되었으니 한 끼에 삼백원 정도인 셈이었다.
내가 있던 사동에 출역수들이 수감되어 있는 곳이어서 온종일 조용하다가 저녁이 되면 시끌 벌게 해졌는데, 옆방의 방장과 안면이 생긴 뒤에는 가끔 특별한 먹을거리가 슬쩍 식구통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대개는 구매 물품에 없는 것들로 입감하기 전에 하는 신체검사를 피해서 숨겨들어올 만한 것들이었다. 가끔 작업 가방에 짓눌린 순대 라든가 육포나 훈제 족발을 들이밀기도 했는데, 구정 무렵 느닷없이 플라스틱 병에 담긴 소다수가 들어오면서 옆방 방장이 큰소리 호기 있게 외쳤다. 시언한 사이다 쭈욱 하쇼잉.
나는 이 추위에 웬 사이다를...... 중얼 대며 그래도 성의를 생각하여 뚜껑을 따서 한 모금 마시고는 예상치 못한 맛에 놀랐다. 사이다를 덜어 내고 소주 한 병을 섞어놓은 것이었다. 내일은 명절이니 한잔 하라는 호의였다. 그는 목포 출신 건달로 내 이웃에서 일년 남짓 살다가 건너편 사동으로 이방했다. 나는 이것이 교도소 조폭의 좌장이나 다름없는 장 아무개의 배려 있음을 알아챘다. 그리고 겨울이 되자 행동 대장이 이 아무개는 내게 내복을 보냈고, 나는 차입된 물품 중에서 털양말과 모자를 답례로 보내기도 했다.
주말에는 상상속에 '외출' '외박'을한다. 요리책이나 맛집에 관한 에세이집을 읽는 것 하루는 혼거방에서 짜장면과 짬뽕으로 말다툼이 벌어지더니 탕수육과 잡채 중에 어느 것이 더 맛있냐로 해서 격투가 시작되는 상황도 있다.
외출을 위해서라면 우선 지도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동차, 등산, 낚시에 관한 책들과 언제부턴가 나오기 시작한 유럽, 미국, 남미, 동남아, 일본, 중국 등지의 여행 안내책자가 옆에 있으면 된다. 국내 여행을 하려면 우선 마음에 드는 자동차를 고른 뒤에 지도를 펼친다. 그러면 나는 어느새 대관령을 넘어 바다를 따라 동해안으로 내려가기도 하고 서해안을 따라 목포에서 페리호에 차를 싣고 바다를 건너 제주도에 도착해서 중산간도로를 넘어 한라산을 지나 서귀포에 당도한다든지 해안도로를 일주하기도 한다. 등산도 하고 낚시도 하며 돌돔을 잡거나 가다랑어와 사투를 벌이기도 한다. 국내 여행이 싫증이라면 이제 해외로 떠난다. 책이 없어서 옆방에 물으면 '지금 파리 에서 출발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가고 있는 중'이라며 스페인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내 방으로 넘겨주겠다는 대답이 온다.
외박은 월간 전원주택이나 인테리어 잡지 등과 함께 하는 것인데 나는 잡지를 보다가 마음에 드는 건축자재나 인테리어 용품이 눈에 띄면 슬쩍 찢어서 보관해두었다. 처음에 이층집 설계도를 그리다가 나중에는 아무래도 집필을 하기에는 살림집과 작업실을 분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단축집으로 바꾸고 작업실로 쓸 별채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도면을 그리기 시작하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만큼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도면이 완성되면 보관해둔 인테리어 사진들을 늘어놓고 도면을 그린 편지지 뒷면에 붙여져 가며 머리속으로 집을 짓기 시작한다. 기초공사를 하고 벽체를 세우고 지붕을 얹고 하는 동안 건축자재를 수도 없이 바꿔 댄다.
어떤 이는 이를 '외박'이라 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집에 간다'고 말한다. 수인은 지상에 짓지 못할 '즐거운 나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만 깨어나 주위를 돌아보면 시멘트 벽이 작은 몸을 둘러싸고 있을 뿐이다. 꿈에서도 옥방 밖으로 나가 들꽃이 만발한 들판에 노닐다가 점호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가 깼다는 어느 장기수의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는데, 나도 같은 체험을 여러 번 했다. 한번은 내가 평소처럼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는 데 익숙한 골목길에서 우리 집을 찾지 못해 온종일 헤매다가 교도소로 돌아오는 꿈을 꾸고는 그렇게 허탈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석방되어 집에 갔더니 아내와 아이 대신 다른 가족이 살살고 있어서 당황하여 나온 적도 있고, 어느 날은 내가 어린 내가 피난길에 식구들을 전부 잃어버리고 혼자 집에 돌아와 온통 쑥대밭이 된 마당에서 엄마를 부르며 울다가 깨어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 생각해보니 꿈속에 어린아이는 내가 아니라 뉴욕에 남겨두고 온 아들 호섭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집 집게 열중하다가 돌연 심드렁 해졌다. 몇 년 후에 석방되면 과연 내가 돌아갈 집이 있긴 한 건지 시간이 흐를수록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내게 과연 꿈꾸는 집이 존재하긴 할 건가 어찌 보면 다섯 살 때의 어머니 등에 업혀 38선을 넘는 순간부터 만 한 돌아갈 집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내가 유난스러울 정도로 집에 집착하는 것도 정체를 잃어버린 데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형기가 정해진 상태에서 수강생활이 무슨 상상을 못 할것인가? 하지만 깨고나면 잃어버린 꿈의 환상을 붇잡으려고 헤매다가 깨는 반복의 생활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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