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 검은 방. 정지아作. 2019.

no pain no gain 2025. 3. 10. 09:24

📚  검은 방. 정지아作. 2019.
아흔아홉살. 빨치산 이었던 엄마는 과거를 회상한다.
첫남편과 지리산 천황봉 아래에서 눈속에 파묻혀 고요하던 그 때. 신세계를 꿈꾸다 보급투쟁 후에 죽은 남편.
칠년의 감옥생활. 그리고 두번째. 같은 빨치산 이었던 남편을 만나 마흔둘에 딸아이를 낳는다. 그래서 '빨치산의 딸'이 된다.

늙으막에 치매걸린 남편. 하루 소주 세병과 담배를 달고 살던 사람. 바지에 똥을 싸고 그런지도 모른 남편과 일곱살 어린 여동생은 엄마가 출산하다 죽고, 어린동생의 엄마역할을 하느라 젖동냥과 미움을 쑤고 기저귀를 빨고, 먹여 키운다. 아버지가 채취를 하느라 열일곱에 뱀꾼에게 시집을 보내고, 제부는 애 넷을 키우다 스물일곱에 뱀에 물려 죽고. 억척스런 삶을 이어간다. 여동생의 치매. 병원에서 젊어 풀지못 한 성욕을 푸느라 피가 나도록 요분질을 한다.

치매걸린 남편은 똥을 지린 일주일 뒤. 자전거를 타고가다 전봇대를 들이받고 병원에서 일주일만에 죽는다. 그리고 곧 뒤따라가겠다는 세월이 삼십년.

뭣하러 빨치산이 되었느냐는 물음에 여자도 공부하고 밥굶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동등한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는 말에. 자본주의 세상은 그런 노력없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 졌다는 논리가 허망스럽다.

"방 밖으로 나가기 어려워지면 그녀의 시간은 이 검은 방에 갇혔다. 검은 방에서는 시간이 제 맘대로 흘러 죽은 자들이 살고 살아 있고 함께 있을 수 없는 자들이 함께 있다. 직선으로 살아온 시간을 실타래처럼 엉켜 놓은 것이 어둠 인지 그녀 자신인지 알 수가 없다. 검은방에서는 그녀의 구십구년은 안개처럼 고여 있다. 그녀의 숨결에 따라 어떤 기억은 물안개로 피어오르고 어떤 기억은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피어오르는 것은 무거운 기억들이다. 새로운 것들 들은 좀처럼 검은방 안으로 스며들지 못한다. 날이 갈수록 검은방의 기억들은 불꽃처럼 찬란하게 피어난다. 그녀는, 살아있는 그녀는, 오직 기억 속에서만 살아있다."

"생생하게 살아 있던 아흔아홉해의 기억들이 꿈이었던 듯 사라지고, 그녀는 우두커니, 저 따라 나서지 않는 제 마음, 들여다본다. 그 마음, 치매 걸린 동생의 요분질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그 마음, 거두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검은방, 구십구년의 기억 속에 다시 갇힌다.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기억들 뒤엉켜 뛰논다."

제주4.제주 4.3사건과 여순반란에 이은 구례, 곡성으로 기차를 타고 올라오던 반란군에 합류한 지역 주민은 엉겁결에 지리산으로 들어간 빨치산이 된다. 그곳도 사람사는 세상. 그러나 현실은 혹독했다. 굶어죽고, 병들어 죽고, 동상걸려 죽고, 총맞아 죽고 그러다 그 모진 삶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훗날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