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길산 12권의 마무리. 황석영 作
"그대가 운산군수 최형기 인가?"
무리 속에서 길산이 물었다. 마당 안에는 장정들이 쳐든 횃불빛이 휘황하여 최형기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마당을 꽉 채운 사람들의 어깨 위로 번쩍이는 칼날과 총포의 숲이 내려다보였다.
"양곡과 무명이 많이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어찌할까요?"
" 말 꽁무니에 매어서 운산 고을 곳곳에다 뿌려두어라. 백성들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모두 쓸어갈 것이다. "
" 사또, 그렇지 아니한가. 그대는 살아 남더라도 고을을 점령당한 죄로 조정해서 파직 처분을 받게 되겠지. 우리를 토포하려고 준비한 군량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겠다."
최형기는 그가 분명히 마감동 보다는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감동과 맞섰을 때는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그의 속임수가 어떠한가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 일어났다. 그러나 지금은 장길산이 이쪽에 태세에 방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일일이 응대하여 오는 것이었다. 체형기는 부동의 자세에서 요략으로 바꿔 칼을 옆으로 비스듬히 내리면서 말을 건넸다.
"내 목을 원하거든 어서 달려들어 취해보라. 갑자기 오금이 저리느냐."
"나는 그대가 토포를 즐겨하기로 사양 하려 하였더니, 공격을 원치 않는다면 내가 먼저 시작하겠다. 그 대신 삼 합 동안은 그대를 먼저 베지 않을 것이다."
병서에 명장은 이로움을 보고 잃지 아니 하며 시기를 만나면 의심치 않는다 하였다. 이로움을 잃고 시기를 놓치는 자는 도리어 재앙을 받는 셈이며, 지혜가 있는 자는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싸움에 교묘한 자는 일 각을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돌연히 치는 벼락 소리에 귀를 막을 사이가 없으며, 번갯불에 눈을 감을 여유를 주지 아니 하며, 적진으로 달려드는 것이 깜짝 놀란 광인과 같이 빠르고 속하게 타격을 주어 이러한 예봉을 미처 막아낼 틈을 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삼합이 이루어졌다.
길산은 처음 자세대로 역으로 쥔 칼을 팔꿈치에 대고 두 손을 늘어뜨린 채로 섰다. 최형기가 거추상스럽다는 듯이 구슬상모를 벗어서 모래 위로 던져버렸다. 최형기 쪽에서 볼 때 장길산은 검법을 쓰는 자가 아니었고, 검술을 고르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그런 단계를 지나 있었다.
최형기는 차츰 자신을 잃었다. 마감동의 검에서 끊임없이 어떤 수상쩍은 냄새가 났지만, 이번에 검은 있는 그대로였다. 마치 바람과 수면이라고 나 할까.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과 강약에 따라서 연못의 물결과 그림자는 웅변한다. 그때마다 상대방의 검과 동작과 힘에 대응하여 천변만화하는 동작이 나오는 것이다.
"과연 훈련 원의 교관 답다. 그대의 검은 삼합까지 배운다고 말했다. 이제 단 한번으로 내 것을 가르쳐 줄 테니 잘 배워두어라."
길산은 칼을 바로잡았다. 그리고는 긴 원을 그리며 모둘빼기를 넘는데 놀이판에서 갓 쓴 열두 사람 세워놓고 넘으면서 공중에 떠서 몸을 옆으로 앞으로 틀어 방향을 자유자재하며 바꾸는 동작이었다. 중간에 젠 발을 땅에 대었다가 다시 몸을 두 배 띄우기도 하는 것이다. 최형기가 무조건 칼을 쳐들어 유성(流星)으로 그어대는데 길산의 몸이 퉁겨지는 것만 보일 뿐 칼은 간혹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 일 뿐이며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와 맞부딪치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길산이 최형기의 몸을 뛰어넘어 아까와 반대편 그만큼의 거리 자리에 가서 떨어졌다. 최형기는 자신을 둘러보았다. 그의 구군복의 검은 전복이 좌우로 길게 찢어졌고 허리에 두른 전대가 잘려서 땅에 끌리고 있었다. 최형기는 말라붙은 입술을 핥았다. 그는 칼을 내려뜨리며 부르짖었다.
길산은 눈이 날카로우 지면서 모래밭으로부터 시선을 떼어 최형기의 미간을 찌를 뜻이 노려보았다.
"어리석은 놈. 일찍이 관가의 통인으로 자라나 약한 백성의 온갖 수모를 모두 겪어보았으면서 오히려 양반 사대부 보다 더욱 우리 같은 천민을 미워한자, 하찮은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이름 없는 양민의 목숨을 벌레 같이 알았고, 활빈도를 도포한다는 핑계로 병장기도 없는 아녀자들을 살해한 죄는 천추에 씻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장길산으로 허명이 있다 하나 이것은 조선 팔도 방방곡곡 백성들이 역병과 굶주림에 죽고 싸우며 이룬 이런 이름이지 내 이름이 아니다. 비록 이 작은 육신이 내게 죽어 썩어져 버린다 한들 너는 장차 수없이 생겨날 장길산과 활빈도를 어찌할 터인가. 너의 공명심으로는 저자의 왈짜배 에게 칼질이나 할 터인즉, 개심하여 집에 돌아가면 유순한 가장으로 여생을 살아가거라. 그 대신에......"
길산은 거침없이 성큼성큼 다가 들었고, 최형기가 틈이라도 엿보러고 내려뜨렸던 칼을 재빨리 쳐 드는 것을 쳐내면서 연이어 전혀 다른 힘차고 살기있는 동작으로 바꾸면서 아래로 내리쳤다. 으아 하는 신음이 길게 들려왔다. 최형기는 한쪽 손으로 잘린 손목을 틀어주고 이빨을 악물며 고통을 삼켰다. 그의 잘린 손은 아직도 칼을 쥔 채 모랫바닥에 떨어져 꿈틀거렸다. 그의 손목에서 피가 솟구쳐 떨어졌다. 최형기는 입을 벌리고 무릎을 꿇었다. 길산은 칼을 놓고 돌아섰다.
총성이 울렸다. 최형기가 멍청한 얼굴이 되더니 모레에 쿡 틀어 쳐 박혔다. 길산은 고개를 돌렸다. 체흥복이 총을 겨눈 채 꼼짝 않고 있다가 길산과 시선이 마주치자 천천히 총구를 내렸다
이렇게 결론지어지고 길산은 어디론가로 또 다른 대동세상을 향해서 말달리며 떠납니다.
아내와 아들은 잡혀서 노비가 되어 전라도 어디론가로 떠났다는 소식. 그리고 아들은 섬 어디엔가로 끌려갔다는 이야기와 아내는 딸과함께 우물로 자진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나는 지금도 수많은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을 봅니다. 환국이 어려울 때마다 기치를 들고 떨쳐 일어나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의인들이 바로 그들이 아닐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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