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 오후, 과부 셋. 정지아 作. 2013.
국민학교 동창 셋. 사다꼬(貞子). 하루꼬(春子). 에이꼬(英子). 오랜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그 시절 이름으로 부른다.
사다꼬. 동경제대를 나온 남편은 혼인한지 몇달이 지나지도 않아 산사람이 되었다. 그 남편을 따라 사다코도 산으로 갔고 근 10년 연락이 끊겼다. 산에서 남편을 잃은 사다코는 감옥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십수 년이 뒤 사다코는 저와 똑같은 이력을 가진 빨치산 가난뱅이와 재혼을 했고, 하루꼬에 대해 늘 뭔가 석연치 않은 가슴앓이를 하던 그녀는 당시로 쓴 제법 거액이었던 천원을 부주할 만큼 여유가 생겼다. 공부 잘했다고 인생이 잘 풀리는 건 아니다. 이래서 세상은 살아 보아야 하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채 들고나는 단칸방의 살림을 차린 사다꼬.
감옥에서 나온 뒤 사다꼬에게 집적거리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에는 의사도 있었고, 검사도 있었다. 사다꼬가 잡혔을 때 취조했다는 검사는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몇 번이나 사다꼬를 만나러 왔다. 그런 사람들 다 뿌리치고 왜 하필 가난한 빨갱이냐고 물었더니 사다코는 그래야 속엣말이라도 하고 살지 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사다꼬와 재혼한 가난뱅이는 가난뱅이로도 모자라 읍내를 떠들석 하게 했던 제조직 사건에 걸려 10년 넘게 감옥살이를 했다.
에이꼬. 약사 면허도 없이 일본인이 물려주고 간 김 약방을 운영하던 시절이었다. 면허는 없어도 워낙 수완이 좋아 김약방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시절보다 더 유명했다. 특히 그녀의 한의사에게 의뢰에서 만든 고약과 피부병 약이 효염이 있다고 소문이 나 옆 도시까지 손님이 몰려들었다. 이 바닥돈은 김약방이 다 쓸어 담는다는 소문이 찾아들 정도였다. 그 돈으로 여러 사람이 살판이 났다. 60년대 초반 수십년간 교사생활을 했다면서 모아놓은 돈이 없던 하루꼬.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떡하니 책방을 차려준 것도 그녀였다. 조금만 살갑게 굴었더라면 사다꼬에게도 먹고살 밑천 쯤 마련해 줄 형편이 되고도 남았다. 돈을 잘 벌기도 했지만 그녀는 돈을 쓰는데도 인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다코는 단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린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박조수는 약방을 그녀에게 맡겨두고 국궁이니, 섹스폰이니 쓰잘데기 없는데 미처 밖으로만 나돌았다. 야리야리 부끄럼 많고 다정하던 박조수는 알고 보니 그에게 그녀에게 만이 아니라 세상 아무 여자에게나 부끄럼 많고 다정했다. 결국 박조수는 마흔도 되기 전에 첩년의 무릎팍을 베고 자다 급사했다.
그 무렵에 남편에 대한 정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쓸데없이 돈만 쓰고 속만 태우더니 시원 코 잘됐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듬뿍 사랑을 받았으니 보내는 길도 내가 알아서 하라고 첩년에게 돈뭉치만 던져놓고 그녀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무리 그래도 본실이 너무 하는 거 아니냐고 뒤에서 말들이 많은 모양이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술 마신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박카스를 사먹으러 오는 고등학교 선생과 눈이 맞았다. 애석하게도 남자는 유부남이었고, 결혼 직후부터 아내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우유부단하여 조강지처를 버릴 이유는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체념했으나 남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박카스를 사러 약방에 들렸다. 박카스를 건네주다 손이 스쳤을 때 전기의 감전이라도 된 듯이 온몸이 저르르 떨렸다. 남자가 길고 섬세한 손으로 덥석 그녀의 손을 웅 켜졌고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그녀는 그만 스르르 주저 않고 말았다. 여름이었다. 그 길로 두 사람은 택시를 불러타고 옆도시로 달려갔다. 가는 내내 남자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손바닥이 흠뻑 젖었다. 손이 젖은 만큼 몸이 닳아 올랐다. 여관방에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은 뱀처럼 뒤 엉켰다. 남편과도 나눠 보지못한 뜨거운 정사였다. 남의눈을 피한다고 피했지만 워낙 손바닥 만한 좁은 동네라 머지않아 두 사람의 정분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되었다. 낮이 뜨겁기는 했다. 그러나 제 몸의 욕망을 죽이며 살고 싶진 않았다. 남편은 죽었고 아직 젊은 그녀는 싱싱하게 살아 있었다.
"재혼한 년이나 바람핀 년이나 뭐가 달라서!"
사다꼬를 보낸 뒤 그녀는 요 위에 엎어져 펑펑 울었다. 울면서도 그녀는 남자의 팔배가 그리웠고 살 냄새가 그리웠다. 남자의 아내에게 결국 들통나 관계가 깨진 후에도 그녀는 사다꼬 보란 듯이 남자를 만들었다. 누가 뭐라던 사람답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지금도 그녀는 지난 세월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다꼬만 보면 그날의 수치심이 되살아난다.
하루꼬. 삼십여 년 전 하루꼬의 집에서 한 뿌리 얻어다 심어 놓은 수국이 어느새 마당 한 켠을 점령했다. 하루꼬의 영감은 2년 전 이맘때 세상을 떠났다. 영감을 보내놓고 하루꼬는 누구에게 기 별할 정신조차 없었다. 하루꼬는 나 좀 데려가라고 왜 영감 혼자 갔느냐고 악을 쓰다 울다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다. 첫아이 가졌을 때 잘못되어 자궁을 들어내는 바람에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자식도 없는데다 하루코는 그 남편이서점에 들어갈때 주위 사람들과 별로 어울리지 않은 탓에 장례식장까지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유일한 상주인 하루꼬는 영안실에 오기만 하면 혼절을 하고, 염이며 입관이며 화장이며 모든 절차를 사다꼬가 도맡아 처리했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하루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남편 상을 봤다. 어제는 저는 먹지도 않는 육회를 차려놓고 영감이 죽기 지 몇 년 전부터 고기 썰기 귀찮아 그 좋아하는 육회 한번 해주지 않았다고 종일 눈물바람이었다. 그래서 너 살아있는 남편 밥상 챙겼노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무래도 하루꼬가 이상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하루꼬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그러겠노라고 그 약속했던 하루꼬의 남편은 늘 그랬듯이 하루꼬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자다가 세상을 떠났다. 죽은 남편에게 안긴 채 잠에서 깨어난 하루 코는 그대로 혼절했다.
과부 셋. 함께 먹을 고기를 사러간다. 에이꼬가 사는 빌라. 시멘트로 포장된 빌라 주차장이 거칠 데 없인 봄볕이 가득하다. 부신 눈을 함초롬히 뜬채 그녀는 씩씩하게 걸음을 옮긴다. 앞으로 몇 년을 더 살까? 1년? 혹은 10년? 아직 그녀는 아픈데 없이 건강하다. 허리도 굽지 않았고 그 흔한 관절염도 없다. 그래도 내일을 장담할 수가 없는 나이이긴 하지만 그녀는 살아있는 한 재미있게 살 작정이다. 살비듬 부스스 떨어지는 노파지만 치근 대는 대서소 김영감도 있다. 김영감 팔을 베고 자다 죽는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녀는 봄볕 속으로 네 활개를 치며 걸음을 옮긴다.
젊어서 어떤 삶을 살았던 지난 것은 모두 과거가 되고, 앞으로의 삶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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