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투사에서 추악한 변절자로. 카렐 추르다.
언젠가 실화를 근거로 만들었다는 영화. '새벽의 7인'을 봤다.
체코를 모태로한 이야기였는데 .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백(百) 탑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많고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프라하 구시가지에서 광장과 화약탑을 지나 카를로프 다리를 건너는 여정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중세로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서 계속 걸어가면 멀리 프라하 성과 비투스 성당이 보이는데 가까이 가서 보면 그 웅장한 모습에 압도되고 만다. 도시의 모든 건축물들은 정교하게 제작된 다양한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 프라하는 유럽 중에서도 가장 고풍스러운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관 속에서도 건물 일부분에 총탄 자국이 무성한 다소 의아해 보이는 곳이 있다. 바로 카를루프 다리 인근에 있는 '성 키릴과 성 매토티우스 성당이다. 프라하는 2차 대전의 전화 속에서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기에 18세기에 지어진이 바로크 양식의 성당에 있는 총탄 자국은 의아함을 지어낸다. 이는 체코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장면이기도 한다.
히틀러는 1933년 1월에 집권한 후 조금씩 자신의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선 1935년에는 재무장을 금지했던 베르사유 조작을 파기하고 본격적인 재군비에 들어갔으며 1936년 3월에는 라인강 서안의 독일땅인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 시켜 느카르노 조약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또한 2년 후인 1938년 3월에는 같은 독일어를 쓰는 게르만 민족의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며 대외 확장에 대한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뮌헨에 모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까지 유럽 4대 강국은 체코슬라바키아 운명에 대해 협의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어이없게도 당사국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를 주변국에 할양하는 것이었다.
이후 파리에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를 수립한다.
1911년 체코 남부의 스타라 홀리나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카렐 추르다는 평범한 농촌 대가족의 일원으로 초등교육을 마친 후, 잠시 벽돌 공으로 일했고 1933년에 체코슬로바키아 군에 입대했다. 제29보병 연대 배속 받은 그는 착실히 진급했지만 1938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군이 헤체되자 폴란드를 거쳐 프랑스로 건너갔고, 전쟁 발발 직전인 1939년 8월에 알제리에 있는 프랑스 외인부대의 제1 연대에서 근무했다. 이후 프랑스 내 체코슬라바키아군에 합류한 그는 이곳에서 독일과 투쟁을 이어나갔다.
영국에서 영국군 특수전 과정을 이수했으며 낙하산 교육도 받았다.
이후 그는 체코 본토에서 사보타지를 전개할 요원으로 선발되어 '아웃 디스턴스' 작전에 투입되었는데, 요원들의 임무는 프라하의 프라하-미흘레 가스정유소 등 사회 기반시설과 독일군의 핵심 군수 시설인 스코다 공장으로 폭격을 유도하고 현지 저항 세력에게 무전기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베네시 대통령은 영국 측의 요구도 만족시키면서 국제적으로 체코인들이 더 이상 독일측의 고분고분한 노예가 아니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요인암살이었는데 최종적으로 선정된 대상은 당시 보헤미안- 모라디아 보호령의 최고 실권자이자 '프라하에 도살자'로 불리던 나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였다. 하이드리히는 금발에 장신으로 과거 해군 정보장교로 근무했고 당시에는 나치 친위대소속으로 체코를 최대한 수탈하면서 독일의 전쟁 수행에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멤버들은 하이드리히 동선과 경호상태 등을 분석하였고, 하이드리히가 그의 집에서 프라하 성 직무실로 가는 도중에 있는 급커브 도로가 암살을 실행 하게 최적인 곳으로 결론을 내렸다. 전차 정류장이 가까이에 있는 이곳에서 하이드리히의 차는 속도를 줄일 것으로 예상되었고 쿠비스와 가부치크는 바로 이때 공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1942.5.27. 10시반에 메르세데스 오픈카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가브치크가 코트에 숨겼던 스탠 기관단총을 발사했지만 스탠 기관단총 특유의 악명 높은 총알 걸림 현상이 나타나 총이 발사되지 않았다. 당황한 가부치크는 도망가기 시작했고 그 직후 인근에 있던 쿠비스가 폭발물을 던졌는데 하이드리히 차량 우측 뒷바퀴에서 폭발했다. 쿠비스는 작전이 실패했을 거라 생각하고 자 전차를 타고 도망갔고 폭발로 충격을 받은 하이드리히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병원 이송 과정에서 병균에 감염되고 중점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만에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나치는 역사의 길이 남을 악행을 자행한다. 바로 체코 서부에 있는 리디체 마을을 문자 그대로 지구상에서 소멸시켜 버린 것이다. 게쉬타포가 이 마을 사람들이 하이드리히를 암살 한 자들 숨겨줬다는 거짓 정보를 입수하면서 즉각적인 보복 작전이 대상이 되었다.
하이드리히가 사망한 지 일주일 된 6월 10일에 이 마을에 모든 주민들이 단체로 끌려 나왔고, 친위대는 히틀러의 명령을 무자비하게 이행했다. 500명의 주민들 중 남자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총살당했고 여자들은 독일의 라벤스뷔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105명에 어린아이들은 폴란드의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마을 출신 남자들 중 전후까지 살아난 사람은 단 세 명이라고 전하는데 그중 두 명은 조국을 탈출해 영국 군과 함께 싸우던 군인들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아이러니하게도 살인죄로 복역 중인 주민이었다. 나치는 마을의 주민들을 학살한 이후 라디체를 통째로 밀어버리고 모든 공공 기록에서 지워버렸다.
라디체 사건 이후로 자신은 물론 가족들도 모두 죽을 수 있다는 엄청난 심리적 압박에 짓눌린 추르다는 체코 경찰에게 암살범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더 이상의 무고한 학살을 중재라는 익명의 편지를 썼다.
추르다는 자진신고 및 사면 기간이 다가오자 게 쉬타포 본부인 페체크 궁에 가서 자수했다. 게쉬타포의 심문을 통해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요원 및 저항운동원들에 대한 정보를 누설했다.
6월 18일 새벽 독일군은 볼타바강 옆에 위치한 성 키릴과 성 메토디우스 성당을 대규모로 포위하였다. 성당 안에는 일곱 명의 요원들이 있었고 독일군들은 이들을 생포 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대규모 움직임을 발견한 요원들은 발포하였고, 이후 6시간에 걸진 전투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의 맹렬한 기관단총 세례 속에서 스텐 기관총과 권총 만으로 버티던 이들은 한 명 한 명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점차 실탄이 떨어져 가는 가운데 최후의 보루인 지하실에서 독일군이 사다리를 환기구를 통해 밖으로 끌어내자 더 이상 밖을 볼 수 없게 되었고, 독일군은 환기구에 소방호스를 집어넣어 물을 부었다. 지하실에 차오르는 물을 보며 최후를 직감한 남은 요원들은 모두 자살하고 만다. 조국을 해방 하겠다는 강력한 신념을 가진 이들답게 영웅적인 최후를 맞은 것이다.
그는 중대한 반역자로서 프라하의 판크라츠형무소의 수감되었고 재판 과정에서 "왜 요원들을 배신했는가?"라는 질문에 "당신도 거금을 받는다면 똑같이 했을 것이다"라는 어이 없는 답변으로 재판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내었다. 그의 죄는 너무나 명백하여 이후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 되었고 1947년 4월 29일 형이 집행되어 배신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되었다.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나온다. 왜 친일을 했는가 하자 독립이 될 줄 몰랐다는 항변으로.
반역자와 배신자들. 이준호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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