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사랑한 폐인 중 약속의 숲. 최인석作

미국으로 아내와 딸을 찾으러 간다.
11년 전에 이혼한 아내.
이유는 국회의원 후보등록을 위한 가족이 필요하기 때문에.
80년대.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다가 두 차례 옥살이를 하고, 아내는 한국이 싫다고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아내는 관광안내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꽃잎 같은 입술, 병아리 깃털같던 딸아이는 학교를 그만두고 가출을 했다고 한다.
딸을 만나는 자리. 딸은 아비의 목을 끌어 안으며 한바탕 울음을 쏟아놓았다.
' 다른 도전적이고 건조한 어조로 얘기를 계속했다. 딸의 설명은 결국 몇 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인종차별, 인종차별의 완고함과 냉혹함, 그로 인한 소외감과 무력증과 절망감. 백인들에게는 검은 얼굴이나 노란 얼굴 가진 사람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어쩔 수 없이 같이 살 수밖에 없기는 하나 더불어 우정이나 사랑을 나눌 수 없는 존재, 거리의 웅덩이나 인플레이션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아니 이곳 남자들이 동양 여자를 종종 성적 놀이의 대상으로 봐주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공부를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결국 웨이트리스가 되거나 성적 놀이 도구가 되거나 백인들을 옷이나 세탁해주고, 백인들 먹을 야채를 다듬어 팔거나 커피를 끓이는 일할 수 있을 뿐인데. 백인들을 시혜와 찌꺼기로 연명이나 할 수 있을 뿐인데,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또한 백인들이 그렇게 부려먹는 데에 지장이 생기거나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정도만 베풀어 주는 교육은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우리의 역사 교육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백인들의 역사 교육에 불과했다. 그들은 우리 사회 교육이라고 말했으나, 그 역시 백인들의 사회 교육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백인과 유색인종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으므로. 그런 교육은 소외감과 절망감과 무력증을 강화시킬 뿐이었다.'
딸의 말은 조리가 서 있었고, 나름대로 전혀 엉뚱 하다고만 할 수 없는 확신의 차있었다. 문화적 차이로 생긴 인해 생긴 거리를 제거하고 본다면, 자연스럽게 더 다른 크게 잘못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비는 어떤 면에서는 딸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 아비는 딸의 말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었다. 어미는 딸을 설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딸에게 어쩌면 압도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어미가 심정적으로만 깨달은 사실을 따른 논리적으로 깨우치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덩달아 네 말이 맞다, 내 말이 맞아, 하고 맞장구쳤을지도 모른다. 애걸했을 것이다. 그래도 엄마랑 같이 살자. 어떻게 하니, 그리고 그래도 학굔 다녀야지.
"난 나의 대디, 그건 내 선택이었어요."
"한국으로 돌아가자. 엄마는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거긴 인정 차별이 같은 건 없으니까 가출할 이유도 학교를 다니지 않을 이유도 없겠지."
뜻밖에도 딸은 반색을 하면 두 손을 마주잡고 아비를 바라보았다. 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정말이에요. 대디 한국에 가서 마미 대디가 같이 사는 거예요!"
아비가 그렇다고 하자 다른 다시 그의 목을 얼싸 안았다. 안심을 하며 딸의 등을 쓸어주고, 여전히 다소 꺼림직한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노랗게 염색이 된 딸의 머리칼도 쓰다듬어주었다.
"고마워요. 대디 정말 고마워요. 보고 싶었어요. 한국에 가고 싶었어요......."
아비는 다시 다짐했다.
"학교에 들어가야 해. 집을 나갈 생각 따윈 하지도 말아. 정 연극을 하고 싶으면 학교 졸업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아비는 알 수가 없었다. 어미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딸을 데리고 오는 일을 그토록 두려워했을까? 딸이 전화기 앞으로 다가 앉으며 물었다.
"이제 마미 올라오라고 할까요? 철이 데리고?."
"한국에 가면 철이도 같이 살아요?"
철이라니? 그게 누구인가? 아비가 묻자 그제야 딸은 그 자리에 고스란히 얼어붙은 아비를 쳐다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섭섭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비는 딸에게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미한테. ..... 못 들었어요?"
철이? 딸이 철이라고 말할 때의 그 포근하고 따뜻한 어감이 문득 불길한 예감으로 이마를 스쳤다. 아비는 눈앞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았다. 뭔가 아비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무엇인가가 마침내 아비의 머리를 내리치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아비는 달아나고 싶었다. 피하고 싶었다.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아비는 무슨 소리냐고 묻지 못했다. 아비는날아드는 주먹에 맞서는 기분으로, 곧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뜬 채 멍하니 딸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내 아기요."
아비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기? 무슨 아기? 누구 아기? 윤경이 네 아기 말이냐? 네가 아기를 낳았다는 거냐? 아비의 발밑이 까마득하게 무너져 내렸다. 아비 얼굴이 이마에서부터 아래로 하얗게 질려 갔다. 그 얼굴을 딸은 어제 밤의 어미처럼, 차고 냉정해 보이는 눈으로, 어떻게 보면 심술궂어 보이는 표정으로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머리가 어떤 어마어마한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지금 저 아이가 아기라고 했던가? 내 아기라고? 그게 무슨 소리일까? 설마 내 아기라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비는 가까스로 물었다.
" 뭐라고?"
" 내 아기요. 철이요."
객실 문이 열리고 어미가 들어섰다. 어미의 품에 아기가. 곱슬머리는 검은 머리칼의 검은 얼굴에 아기가 안겨 있었다. 아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어미 품에 안긴 그것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것은 괴물이었다. 아비가 케네디 공항에 내린 이레 두려워하던 바로 그 괴물이었다. 아비의 온몸을 소름이 흝어내렸다. 아비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하여 모든 위험과 두려움을 피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결국.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