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녹즙 병장 미스김 전역하다.

no pain no gain 2023. 12. 25. 12:59

녹즙 병장 미스김 전역하다.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녹즙을 그만뒀다. 대학원 졸업 학기 인데다 이사까지 가게 되어서 녹즙 배달를 도저히 할 수가 없어 녹즙 아가씨는 그냥 아가씨가 되었다. 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경매 최고서라는 굉장한 유산을 남기시는 바람에 이병헌을 닮은 잘생긴 깡패가 집에 찾아와서 추석까지 집을 빼달라고 했다.

평생 목사 사모님으로 살아온 어머니를 차마 깡패와 마주치게 할 수 없어서 알겠다, 빼주겠다,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하늘에서 나에게 이렇게 잘 생긴 남자를 보내 주시는구나 하고 이 와중에도 웃었다. 안 웃으면 어쩌겠는가. 어머니는 재판 결과를 기다렸고, 보증금을 하나도 돌려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참담한 결과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그냥 그랬다.

전에 혼자 살던 자취방 전세금 빼서 아버지께 드릴 때에도 어쩐지 돌려받을 것 같은 느낌이 안 들더라니 이렇게 되려고 그런 모양이었다. 내내 살림에 빵꾸가 날 때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는데, 이번에도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어머니는 의연하게 방을 구하고 이사 일들을 처리했다. 이번에는 늠름한 어머니 뒤만 따라 갈 수 있었다. 그간 부모 덕본적 한번도 없다고 원망하던 것들을 싹 잊기로 했다. 아버지가 살뜰이 가꾸던 교회 건물을 떠나면서 마음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오래 아파한들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이사한 다음 날까지 계속 녹즙을 배달했다.

녹즙도 그만뒀으니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 사느냐 물으면 좀 초조해야 할 텐데, 어찌 그냥 태평하기만 했다. 그냥저냥 먹고는 살아요. 이 녹즙 일기를 연재한 월간 <작은책>에서 원고료 대신 쌀을 보내주는데, 그것만 해도 엄마랑 두 식구 한 달 먹고 산다.

어쨌든 글 값 대신 받는 쌀 먹고 수돗물 틀어 먹고 대강 지내는데 그냥 매일 즐겁다. 즐거운 일이 하나도 없것만 이렇게 막 즐거워서 되나 싶었으나 자책의 마음은 별로 들지 않고, 공부하고 책 읽고 도서관 가고 돈 안 쓰고 대강 간장에 밥 비벼먹고 먹고 그냥 즐겁다. 이게 제일 감사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자본주의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노숙자'라고 한다. 법이고 보장제도고 아무것도 없이 제멋대로 사는 노숙자가 체제야 내 알바 아니라는 식이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내로 태어났다면 노숙자 노릇 한번 해봤겠건만 여자의 몸이니 그렇게까지 해보긴 뭣하고, 지금도 그냥 칠렐레팔렐레 하고 산다. 없이 사는 놈들이 있는 놈들 배 아프게 할 수 있는 수가 딱 하나 있는데, 그저 실 웃고만 다니는 것이다. 개뿔도 없으면서 도대체 뭐가 그렇게 즐거워 실실거리고 다니느냐고 아무리 다그쳐도 안 가르쳐 주고 그저 헤실헤실 웃기만 하는 것이다. 약 오르지, 우린 즐겁지롱, 하면서 시절이 엄할수록 웃어 볼일이 눈 씻고 찾아본들 있겠냐만, 그래도 실실거리면서.

개척교회 목사의 딸.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힘과 억척으로만 세상을 살아가기. 아니 집안 살림 보태기 까지.
강압적인 고등학교를 두 달 만에 박차고 나와서 쓴 <네 멋대로 해라>로 세상에 주목을 받으며 모 신문광고 모델로까지 등장했다. 한국 종합예술학교 영상원에 최연소로 합격하여 일고여덟개에 달하는 화려한 아르바이트를 경력을 쌓은 채 가까스로 졸업했다. 이른 나이에 단편영화감독, 웹진 편집장 등을 거쳐 영화 <언니가 간다>의 시나리오 작가로 입봉했으나 영화는 장렬하게 흥행에 실패했다.

남자들이 "야, 한번 줘라!" 하는 말에 거부하면 대부분 화를 낸다는.
"내가 그렇게 싸 보였나?" 가 압권이다.

김현진 산문집에서. 육체탐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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