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기생 딸의 만남. 운보 김기창.
17세 귀머거리 소년 김기창(1913~2001 )이 이당 김은호(1892~1979) 선생 마루청에서 무릎 꿇림을 한 채 붓을 잡은 지 딱 반년을 넘긴 해인 1931년 그는 제10회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판상도무 板上跳舞. 널뛰기> 라는 작품으로 입선을 따내 제자 잘 고른 스승의 마음을 족하게 해주었다.
모친 한씨가 맨 처음 '운포雲圃'라는 호를 지어주며 자식의 등을 두드려준 것도 그 해였다.
이름에는 이름 해는 <수조>, 다음해는 <여인> 그다음해는 <정청>이 올박이 화가의 응모 작에는 내리 족족 입선방이 붙었다. 선전에 심사위원들은 '귀는 먹었지만 붓질 하나는 용한 천재' 화가로 그를 기억해주었다.
나라를 빼앗긴 경성의 가을빛은 더욱 서러 웠다. 운보의 들리지 않는 귀에조차 1932년 반도에 가을 오는 소리는 들렸다. 열아홉 되던 해 가을, 그는 한 여인을 잃고 한 여인을 만났다.
사무치는 정으로 돌봐주는 모친이 갑자기 세상을 뜨자, 조모와 함께 남게 된 남산밑 운니동 집은 더욱 썰렁했다. 그 빈자리를 채우듯 건너 방에 새로 온 모녀가 있었다. 딸의 이름은 이소제 열다섯이나 됐을까, 어스름 달빛 아래에서도 볼이 유난히 발그레한 소녀였다.
"하필 폐 앓이하는 여자가 들어오다니, 게다가 기생이라구? 딸까지 낮빛이 신통치 않아."
할머니는 어미 잃은 운보의 눈길이 금세 소제에게 쏠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소제 어머니가 권번 에 나간 뒤면 운보는 버릇처럼 건넛 방 앞에서 얼쩡 됐다. 마뜩지 않은 조모 눈총에도 그는 벌써 소제를 모델로 다음에 선전에 인물화를 내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화가와 기생 딸인 모델. 소제는 그의 손발 노릇을 마다않고 했다. 밤 늦은 작업으로 피곤해 진 운보 대신 물감 통을 비우고 정성스레 붓을 씻기기도 했다. 이마에 땀을 닦아주는 소재의 옷고름에서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 냄새를 맡았다. 소제를 모델로 작품 <여인>이 선전 입선 작으로 발표되는 날, 그녀는 운보보다 더 기뻐 날뛰었다.
그러나 그날 운보의 눈에 아프게 박힌 것은 소제의 입술이었다. 단 한 번의 기침에 핏빛으로 물드는 그녀의 아렛 입술을 그는 먼 훗날까지 잊지 못하게 된다.
1934년 초 봄, 운보는 그 지금 밭은기침이 눈에 띄게 잦아진 소제와 그의 막내 누이 기억을 데리고 몰래 집을 나섰다. 할머니의 성화가 더욱 심해질 때였다. 깊은 밤부터 동이 틀 때까지 소재 방에서 들려오는 기침이 손자의 가슴에 옮기기라도 할 듯 부득부득 둘 사이를 막았다. 그러나 운보는 소제의 치마만 스쳐가도 어머니의 체온이 느껴졌다. 한번만 더 그녀를 모델로 어머니의 생전 모습을 되살려 보리라.
그날 소제와 운보가 찾아간 곳은 잘 꾸며진 어느 의사의 응접실이었다. 화구를 풀고 소제와 누이를 마치 모녀처럼 의자에 앉혔다. 소제 무릎에 얌전히 손을 올린 누이, 부채로 앞섶을 가린 소제.
축음기의 음악은 정적 속에 녹아들고,운보의 붓은 바람을 탄듯 너울댔다. 촘촘하게 엮인 등의자 그리고 의자의 깔개에 수놓인 무늬까지 운보의 눈은 매눈보다 날카롭게 집어냈다. 마침내 붓을 뗐을 때 소제의 저고리는 땀으로 얼룩 졌다.
내내 꼼짝하지 않던 소제. 운보는 그때서야 그녀가 한번 도 기침소리를 내지 않았음을 알았다. 선전 입선작 <정청靜廳>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1934년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이 된다.
그러나 운보는 입선의 기쁨을 소제에게 전하지 못했다. 발표가 나기 전 소제는 운보의 집을 영영떠났다.
이듬해 가을, 그는 어머니를 여윈 그날 같이 흐느꼈다. 옷고름에 선지 같은 피를 쏟아내고 죽은 여자의 소식을 듣고 난 뒤였다.
운보는 1931년 <판상도무>를 선전에 처음 입선한 뒤, 연 5회 입선과 연 4회의 특선을 기록하였으며, 16회전에서는 <고담>으로 최고상, 제17회전에서는 <하일>로 조선총독성을 수상하여 추천 작가가 되었다.
뉴스에서 일본에서 훔쳐간 '무릉도원도'를 국내로 회수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선의 것을 훔쳐가서 자기네 국보로 만드는 사람들.
이 운보의 그림도 오사카의 한 지역에 있다고 한다는 사실이 씁쓸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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