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늙어빠진 노년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남았다.
눈물로 얼룩 진 편지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는 코에 안경을 걸치고, 장미꽃다발을 든
평범한 이웃 남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남편이 갑자기 돌아와
고풍스러운 옷장안에서 질식해 죽는 일도 없다!
구두끈과 만틸라 스커트에 주름 장식이
사진에 나오는데 방해가 되는 일도 없다.
아무도 영혼 속에 보스의 지옥을 품고 있지 않다!
아무도 권총을 들고 정원로 나가지 않는다!
( 어떤 이들은 두개골에 총알이 박혀 죽기도 했지만,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야생 병원의 들것 위에서 사망했다.)
심지어 무도회가 끝난뒤 피로로 눈자위가 거스무레해진
저 황홀한 올림머리의 여인 조차도
내가 아닌 댄스 파트너를 쫓아서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아무런 미련 없이.
이 은판 사진이 탄생하기 전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그 누군가 라면 또 모를까.
내가 아는 한 이 사진첩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사랑 때문에 죽으이는 아무도 없다.
슬픔이 웃음 되어 터져 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흐르고 그렇게 위안을 얻은 그들은 결국 감기에 걸려 죽었다.
1996년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인 비스와바 심포르스카의 시.
시를 읽을 때는 사랑에 빠졌을 때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잃어서 새까만 절망이 사람을 어디로든 내모는 것일 테다.
목을 매달고, 몸을 던지고, 몸을 자르고, 친구는 사랑 때문에 힘들 때마다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라고 외면서 운다고 했다. 사랑 때문에 죽은 이가 없다는 것은 얼마나 큰 희망인가.
로미오와 줄리엣이 살아 있었다면, 줄리엣이 아이를 보느라 육아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동안 로미오는 육감적인 하녀와 바람을 피웠을 것이다.
결국 사는 게 그런 거지, 하는 쓸쓸한 결론에 이르면서. 내 친구는 사랑 때문에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고 야무지개 중얼거리면서 하루하루 걸어간다. 보답 받지 못할 사랑을 계속하면서 슬픔을 떡볶이와 소주로 달래면서. 혹시 내가 술 때문에 죽으면 술 먹다 죽었다고 하지 말고 그 애가 기어코 내가 아는 한 이 사진첩 안에 사랑 때문에 죽은 사람이 하나는 있다라고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육체탐구생활. 김현진 산문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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