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아나키스트. 박열&가네코 후미코.

no pain no gain 2023. 12. 14. 14:17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가네코 후미코作

거리의 방랑자.
학교에서 나는 두 명의 사회주의자를 알게 되었다. 한 명은 서徐라는 조선인으로 말수가 적고 온화하며 좀 어두운 얼굴을 한 남자였다. 바로 내 왼쪽 책상에 앉아 쉬는 시간에 말없이 가이조改造를 읽고 있었다.
서는 조선의 부자 집에서 유학 온 것이 아니라 나와 비슷하게 늘 생활에 치이며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학교에 나올 여유도 없었으리라. 곧 오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 약 1년 뒤 내가 박朴烈과 같이 살게 되면서부터 서도 우리 그룹이 되어 함께 기관지를 만들거나 운동을 하였다.

그는 자주 조합에 기관지나 팸플릿이나 니플릿 등을 가지고 왔고, 덕분에 나는 그로부터 그런 읽을거리로 얻거나 빌릴 수 있어 사회주의 사상이나 정신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주의는 나에게 특별히 새로운 것을 주지는 않았다. 그것은 다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을 통해 형성된 나의 감정이 정당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확인해주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런 힘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반감을 항상 마음속으로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나와 같은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마음으로부터 동정을 보내고 있었다. 조선에서 할머니집 머슴이었던 고 씨를 동정한 것도, 집에서 기르는 불쌍한 개를 거의 동료 마찬가지로 여겼던 것도, 그 외 이 수기에는 쓰여지지 않았지만 할머니 주위에서 일어난 일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압박받고 가혹한 대우를 받고, 착취당하던 불쌍한 조선인들에게 끝없는 동정심을 가진 것도, 모두 그런 마음의 발로였다. 내 마음속에 타고 있던 이 반항이나 동정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인 것은 사회주의 사상이었다.

아 나는................. 해주고 싶다. 우리 불쌍한 계급을. 위해 내 전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싸우고 싶다.

우리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없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결코 세가와만 힐책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그런 경우 책임 정도는 세가와도 져야 할 터이다. 그런데도 어쩌면 이렇게 무책임한가. 결국 내가 노리개였다는 것을 비로소 통절히 알게 되었다.

현은 여느 때처럼 애매한 표현을 쓰며 조와 둘이서 독일로 유학을 가기로 했으므로 이별을 하지 안으면 안 된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그다지 슬프지도 후회하지도 않았다. 그저 절망적인 기분이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다.
나는 마구 위스키를 마셨다. 얼마나 마셨는지 하였튼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마셨다.

"나는 박열을 알고 있다.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모든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때문에 그가 나에게 저지른 모든 과오를 무조건 받아들인다. 박열의 동료들에게 말한다. 이 사건이 우습게 보인다면 뭐든 우리 두 사람을 비웃어도 좋다. 그렇지만 이것은 두 사람의 일이다. 재판관에게도 말한다. 부디 우리를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 박열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한다. 설령 재판관들이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해도 나는 당신을 결코 혼자 죽게 하지는 않겠다."

요코하마 출신의 가네코 후미코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조선으로 건너와 7년 동안 충청북도 청주군 부용면 부강리에 살면서 할머니와 고모에게 모진 학대를 받았다. 그로 인해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인을 미워하게 되었고 그런 부조리한 상황을 야기한 제국주의 일본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1919년 4월 일본으로 돌아온 가네코 후미코는 도쿄에서 여학교 졸업검정시험을 치른 다음 여자의전에 진학하고자 했다. 하지만 금전에 눈이 먼 아버지가 자신을 외삼촌에게 팔아넘기려 하자 집을 뛰쳐나와 도쿄에서 신문판매대 점원으로 일하면서 영어학원에 다녔다.

1920년 11월, 박열은 조선인 고학생, 노동자들과 함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조선고학생동우회를 창립했다.

그 무렵 이와사키 오뎅집 점원으로 일하던 가네코 후미코는 사회주의자 히라사와 다케노스케와 아나키스트 다카오 헤이베에 등 노동사 멤버들과 교류했고, 그들의 소개로 조선인 아나키스트 원종린, 공산주의자 정우영, 김약수, 정태성 등을 만났다. 당시 사회주의 잡지를 즐겨 읽던 가네코 후미코는 1922년 2월, 정우영이 보여준 《청년조선》 교정쇄에서 박열이 지은 ‘개새끼’란 시를 읽고 전율을 느낀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박열 <개새끼>

강자와 약자의 투쟁, 약육강식 관계가 우주의 대원칙’이라는 전제 하에 ‘모든 사물에 반역 복수함으로써 만물을 멸하는 것이 위대한 자연에 대한 합리적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한 상태였다. 거기에는 약자인 조선을 학대하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투쟁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타인의 노예로 살아왔다. 너무나 많은 남자의 노리개였다.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나 자신의 일을 말이다. 그러나 그 나 자신의 일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알고 싶다. 그것을 알아서 그것을 실행하고 싶다.

가네코 후미코는 그렇듯 철저한 확고부동한 신념으로 기성의 가치관에 저항하는 박열에게 깊은 신뢰와 사랑을 느꼈다.
낯선 남자는 키가 별로 크지 않고, 아주 검고 숱 많은 머리를 어깨까지 척 넘어가게 기른 스물서너 살의 남자였다.
" 기다려 주세요. 조금 더 기다려요. 내가 학교를 졸업하면 우리 바로 함께 살아요. 그때는 내가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겁니다. 결코 당신을 병 같은 것으로 고통 받게 하지 않을 거예요. 죽을 거면 함께 죽읍시다. 우리 함께 살고 함께 죽어요."

그로부터 한 달 뒤인 3월 초순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4월 하순부터 두 사람은 도쿄부 에바라군 세타가야의 데이지리에서 신발가게를 하는 아이카와 신사쿠의 이층 방을 얻어 동거를 시작했다.

내 수기는 여기서 끝난다.
나는 지금 평온하고 냉정한 마음으로 이 조잡한 기록의 붓을 내려놓는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에 축복이 있기를!

하늘은 흐리고 비가 온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가네코의 수기.
전에 본 "바다에서 사는 사람들"책에 참고 되었던 내용이 궁금해서 보개된 책.
프로문학의 중심축을 흐르는 내용중에.
선상에서 먹는 식사는 감옥에서 먹는 식사만도 못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안남미<동남아 쌀로 밥에 가시가 있는듯한 식감?> 30%를 섞어서 지은 고기가 함유된 감방식사가 훨씬 훌륭하다는 의견.

박열과 함께 감옥에 갇혀서 보낸 시간.
그리고 스물셋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게 보낸 마지막의 사랑. 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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