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전상국 作.
그들이 낙동강 전투에서 지구 유행군에게 쫓겨 도망가는 폐잔병이라는 것이 여기저기 숨어 다니며 뭔가 숙덕거리기 시작한 어른들의 입을 통해 알려졌다. 그때부터 난리가 터진 지 서너 달 만에 처음으로 마을에 무서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 위원장님 계십니까. 어느 날 잘 보이지 않던 마을 사람들이 몇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거요. 둔짓골 박 씨네 집에서 인민위원장 대접하려고 닭을 잡았다고 아버지를 거기 가자는 겁니다. 다른 건 생각 안 나도 그때 아버지가 둔짓골 올라가기 전 어머이한테 하던 말만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어요. 쟤가 사대 독자요. 어머니 잘 모시고......웅얼웅얼. 우리 어머이가 놀랄 수밖에요. 준성이 아버지, 왜 그래요? ㅎㅎㅎ. 그때 아버지가 이런 소리로 웃었던 게 생각나요. 그 웃음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한 건, 그때 아버지가 내 손을 잡아주고 한 말 때문일 겁니다. 내가 우리 아버지가 마지막 남긴 그 말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날이 우리 아버지 제삿날이라 그겁니다. 둔짓골 박가네 집에서 담근 막걸리 한 잔에 닭다리를 막 입에 문 순간 밖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방으로 들어와서 아버질 쇠스랑으로 찔렀다 그 말입니다. 쇠수랑에 등을 찔리고도 방을 뛰쳐나가 도망치다가 밭두렁이 엎어진 거지요. 그게 다 한청 사람들이 주동이 돼 한 일 아닙니까. 알아보니 지금 그 사람들 거의 다 죽고 몇 없더라 그겁니다. 살아 있대 도 그걸 어쩝니까.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게 난리인데 어쩌겠습니까. 다 피해자라 그겁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 억울하게 죽었다, 그 생각만은 안 하기로 작심하고 살았다 그 말입니다. 그게 억울하면 또 세상이 뒤집힐 바랄 거 아닙니까 솔직히 이놈의 세상 언제 뒤집히길 바랄 거 아닙니까. 솔직히 이놈의 세상 언제 뒤집히나 그런 생각 많이 하고 살았지요. 허나 그거 아닙디다. 세상 또 뒤집히면 지금까지 억울하게 살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겁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되면 다 죽어요. 죽으면 민족이고 나라고 그거 다 소용없다 그 얘기입니다."
다소곳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을 사람 하나가 불쑥 가득 끼어들었다.
" 정말 쇠스랑으로 사람을 찔러죽였다고요? 아무리 난리 때라 해도 뭔 죄를 그리 졌다고 사람을 그렇게......"
" 뭔 죄를 졌느냐. 나 부귀리 인민위원장 최영호가 그 난리 때 마을 사람들한테 맞아 죽을 그 죄가 뭔지 내 입으로 불어라, 그 말 아니야."
"...... 너 이놈 네가 왜 죽었는지 알겠지? 쇠스랑에 어깨를 찔려 밭두렁에 엎어졌는데 어떤 놈이 괭이로 내려치면서 이렇게 물었겄다. 이런 우라질, 피를 철철 쏟으면 죽어가는 놈이 알긴 뭘 알어. 암튼 죽을 죄를 지긴 졌어. 그러니까 그렇게 재판도 없이 쇠스랑으로 찔러 죽였을 것 아닌가. 인민위원장 감투 쓴 죄. 그게 바로 죽을 죄여. 감투를 쓰니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해. 해 올리라는 것도 지랄 같이 많았어야. 논이고 밭이고 만평 이상 가진 자, 주지 명단을 올려라. 그렇게 큰 땅을 가진 부귀리에 딱 하나 나 씨 집안이라 그 지주 나 아무개 이름 올린 죄. 그해 가을 논농사 작 황에다 예상수확량 보고한 죄. 자위대장 뽑아라, 서기장을 뽑아라, 그래서 뽑은 죄. 조속한 혁명과업 달성하기 위해 부귀리. 농맹, 민청, 여맹을 조직해 보고 한 죄. 허허, 최용호 이놈 두어 달 동안 죄도 많이 졌다. 또 있어 남조선 해방 위해 복골 장영팔이 아들 인민의용군 내보 낸 죄. 아, 또 있구나 또 있어. 탑둔지 전형균이 돼질 외상으로 잡아먹은 죄. 마을에 내려온 군당 사람들 대접하려고 잡았는데, 바뀐 세상에 이승만 돈 쓸 수 없고 인민 화폐인가 뭔가 있다는 얘기만 들었지 구경도 못해, 돼지 외상으로 끌고 와 잡아먹은 죄. 최영호 죽을 죄 또 있구나, 또 있어. 휴가 나왔다 난리 터져 집에 숨어 있는 정대수 색출한 죄. 이런 우라질 포로로 잡아가는 줄 알았지. 그놈이 자작고개에서 그렇게 죽을줄 모른 죄.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이 죄 저 죄 다 짊어지고 갓 서른에 쇠스랑에 찔려 죽은 그 죌 걸세. 이보시오 나정기 선생 그때 최용호 이놈이 그렇게 안 죽었으면 당신 이렇게 살아 있을 거 같아?"
어쩌면 이제는 마지막으로 남은 해방전 세대의 작가라는 의미에서 이런 종류의 소설은 더 이상 써질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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