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집을 떠나 집에 가다.

no pain no gain 2023. 11. 24. 16:38

집을 떠나 집에 가다. 전상국 作.

이보다 오래전 산이 집인 그런 때가 있었다. 산에서 그녀를 만났다. 날렵한 걸음으로 혼자 산을 타는 여자의 뒷모습이 좋았다. 10월이었던가,  굴

참 나무 울울한 숲을 벗어나면서 우와 탄생이 터졌다. 나 혼자 본 것이 아니었다. 우거진 녹음, 한낮의 햇살, 너무 붉어서 숨이 막히는 계곡에  적 단풍 군락. 한숨같이 깊은 탄성, 그네는 옆 모습도 앞 모습도 좋았다. 한눈에 서로를 알아본, 서른을 막 넘긴, 치기의 그 만남은 오직 산에서만, 산그늘에서만 자라는 사랑이었다. 함께 좋은 것을 봤을 때, 함께 몸을 섞는 환락의 그 정점에서 이제 그만 죽고 싶다는, 내 말을 그녀가 받았다. 죽고 싶다, 그게 아니고 죽이고 싶은 거 아니에요?. 죽이고 싶었다. 아름다운 풍경에 숨이 막힐 때, 더 이상 너를 볼 수 없다는 절망으로 눈이 아득할 때 죽이고 싶었다. 싹싹 다 지워버리고 싶었다.

산속을 홀로 떠도는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묻는 말에 계속 머리만 가로 저었다. 산에 언제 들어 왔는지 기억이 없다고 했다. 자기가 누구고 어디서 왔는지도 몰랐다. 남장을 하고 있어 남장을 하게 된 동기가 궁금했지만 그마저 모른다고 했다. 과거로 이어진 기억의 회로가 완전히 끊긴 여자를 만나는 순간의 기억의 그물 속에 뭔가 번뜩이는 게 있었다. 죽고 싶고 죽이고 싶었던 그네를 지워버리기 위해 미치게 술을 마시던 나날, 싹 지워버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수면이 찌만 노려보던 그 여러 날의 소양호 밤낚시. 어느 순간 찌에 홀려 몸을 던진 그 물속에서 더 격렬한 체위로 숨 가쁘게 몰아치는 그녀의 자궁 처럼 물은 깊고 따뜻했다. 두 번째 여자도, 세 번째 여자도 아닌 단 한 번의 그녀가 거기 아닌 여기 내 앞에 있었다. 기억상실증의 여자가 말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소리만 들으며 걷고 또 걷는다고 했다. 여자가 노송에 등을 기대고 쉰다. 그게 무슨 나무인지 나무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다. 실없는 호기심이다.  자기가 기대고 선 그 나무 이름이 소나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 기억이 바로 그네의 과거일 것이다. 여자의 과거가 여자의 기억 속에 없음이다. 여자에겐 눈에 보이는 것들리는 것 들리는 것 만져지는 것만이 존재했다. 그냥 보고, 들려오는 새소리, 물 소리를 들으며 걷는다고 했다. 좋아요. 걷는 게 좋아요. 좋다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뒤에서 살펴보니 여자는 걷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산 곳에 코를 가까이 냄새를 맡고 있었다. 냄새는 어떤 기억에 이르는 통로다.  여자는 기억을 찾아가는 그 냄새 앞에서 오래오래 머물렀다. 멈춰 서 있는 그 자세로 아주 천천히 걷고 있었다.

1940년생인 작가의 글을 오랫동안 읽어온 처지.
아베의 가족이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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