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러시아의 사랑과 고뇌

no pain no gain 2011. 8. 18. 14:38

러시아의 사랑과 고뇌/오노미찌꼬

 

19세기의 러시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에서부터 사회 개혁의 일환으로 혹은 이상향을 깨우는 잠재적 미래상을 그려내는 몽상가 또는 이상주의자가 시인, 소설가로 암울한 상황을 개선해 나가기 위한 밑그림을 그려내는 것을 이제 세월이 흘러 21세기에 다시 금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든다.

 

몇몇의 선구적 개혁을 꿈꾸던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와 그들의 이야기다.

 

체르니세프스키가 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아내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겨 남편이 아내를 양보하는 이야기>를 주제로 하는 새로운 페미니즘의 세상을 연다.

아버지가 집사로 있는 미망인 자산가의 아들은 16세 베라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처음에는 농락할 목적으로 끈질긴 유혹을 하나 베라는 거절한다. 그러자 본심으로 바뀌어 청혼을 하지만, 베라는 응하지 않자 베라의 어머니는 청혼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를 한다. 베라는 집에서 나와 독립할 목적으로 동생의 가정교사와 위장결혼이라는 실험무대에 서막을 연다.

베라는 개인교수를 하면서 스스로 협동조합 방식의 모드 아틀리에 경영을 하는데, 양심적인 봉제(縫製)로 고객의 신용을 얻고, 경리 내용을 모든 구성원에게 공개하고, 이익을 성과에 따라 공평하게 분배한다.

식료품의 공동 구입과 공동취사로 복지 후생을 꾀하면서 독서회 또는 온 가족의 야유회를 열어 서민층 자녀들을 교양 있는 <새로운 여성들>로 육성해 나간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대중적이며 가장 착취가 심했던 봉제공 직업을 택한 체르니세프스키는 <생산물을 그것을 생산한 사람에게 속한다>는 원리에 따라 분배가 이루어 진다면 근로자들이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1858 ~1859년대에 걸쳐 그가 이룩한 경제학 연구의 성과가 유감없이 활용되고 있다. 시대적으로 보면 아직 공산당이론이 성립하기 전 다듬어지지 않은 의식을 주춧돌을 놓는 작업의 시초인 것이다.

 

1840년 대의 게르첸이 쓴 <누구의 죄인가>는 사회적 상황이 농노제로 억압된 생태에서 귀족이지만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젊은 귀족 벨리토프는 남의 부인이 된 류보니카를 사랑하게 되고, 류보니카는 지방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남편에게는 없는 폭 넓은 시야를 지닌 벨리토프를 사랑하게 되지만, 남편과 자식에 대한 사랑과 의무. 그리고 벨리토프에 대한 연정으로 갈등을 느끼게 된 류보니카는 단 한번의 고백과 키스를 나누고 떠나가는 벨리토프를 전송한 뒤 병상에 눕는다. 남편은 날마다 폭음하며 괴로워한다. –누구의 죄인가? -에 대한 작자 게르첸의 물음에 <모든 것은 사회 때문이다. 유능한 인간을 질식시키는 러시아의 구체제 때문이다>라고 인식한다.

 

1860년대의 농노 해방령 후의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사람들을 계몽하려 했던 호소 작이다. 세월이 흘러 베라는 아이를 낳고 나서 더욱 아름다워 졌고, 보다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원하면서 아틀리에 경영을 서서히 젊은 사람들에게 물려주고 새로이 의학공부를 시작한다. 편견과 가난 때문에 남자의사에게 진료받기를 꺼리는 동포 여성들을 위해 러시아 최초의 여의사가 될 작정으로 토론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녀의 능력 차에 대해 이야기 한다.

 

여성이 지능 면에서 뒤떨어진다든지, 이성적이 아니어서 감성적으로 약하다고 하는 것은 오랜 세월 억압되고 교육도 받을 수 없었던 역사적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체력도 순간적인 힘은 약하지만, 지구력 면에서는 여성이 뛰어나며 평균 수명도 길다는 등 당시의 의학의 최 첨단 이론을 개진한다.

 

그 당시 시대적 통념에 따르면 여성의 원죄는 선천적으로 고칠 수 없으며, 그 원죄에 대한 죄 갚음은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범위에 가둬서 남성이 우월한 지위와 교육의 기회 등 사회 저변으로 넓혀나갈 기회조차 박탈된 상태에서의 일례로 레프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안나 까레리나카츄사로 알고 있는 부활등의 여성을 존중하는 사상 속에서 소설을 남기고 82세로 운명을 했지만, 그런 그도 재색을 겸비한 소피아 부인과의 사이에서 13명의 자식을 둔 전통적 가부장의 범위를 벋어나지 못한 상태로 생을 마감했다.

 

시대조류의 흐름은 거대한 물살 같아서 선구적 소설의 모태가 방향을 바꾸는 이정표의 역할을 분기적으로 삼고, 그 파생된 이야기는 여러 가지의 또 다른 흐름을 만든다. 또한 그 풍류를 미리 알고 깨우친 일부 유학파의 학풍이나 그룹에서는 비슷한 이야기로 따라 하기의 페메니즘을 확대 재 창출해나가게 바꾸고, 정작 본류를 이해하지 못한 파생상품의 희생자들은 그 본질이 무엇이었나를 확인해 보기 보다 제 멋대로의 새로운 페메니즘을 재 창조해 나가는 현실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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