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너머 핀 호박 꽃
예전에 사용하던 사무실 옆 에는 철망으로 된 담장을 하나 두고 약간의 공간과 블록으로 쌓은 담장이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건너편 연립주택에 사시던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부지런 하셨던 그 할아버지는 철망과 담장 사이에 난 좁은 비 무장지대(?)에 어디서 공수를 해 왔는지 흙을 채우고 집에서 나온 부산물로 유기질 비료를 만들어서 길다란 밭을 만드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이른 봄이면 밭을 갈고 년 중 농사 계획을 세우고는 철마다 바뀌는 푸성귀를 심어서 아침마다 물을 주고 자식처럼 돌보는 그런 생활에 취미를 가지신 분이셨는데, 어느 해인가 큰 태풍이 불면서 오래된 블록 담장이 무너지면서 지나가던 주민이 크게 다쳐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는 계기로 그 분과의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상치며 배추와 가지도 심고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울타리에는 호박을 올려서 무성하게 주렁주렁 열리는 호박의 특성상 철망 안에도 호박이 열리고 이 쪽 편 울타리 너머에도 호박이 매달리는 상황이 연출 되기도 했고 어느 해 인가는 너무 많은 호박을 매달고 있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울타리가 휘어지는 그런 사태가 발생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 울타리는 너무 오래 전에 설치 된 것이어서 바람만 세게 불어도 밑 둥이 썩은 곳이 여러 군데 있어서 자체 무게 만으로도 휘어져 있는 그런 상태였으니까요.
한 해는 둥그런 철조망 안에 누런 호박이 잘 익어서 꺼낼 수가 없게 되자 나에게 부탁을 해서 장비를 동원해서 철조망을 끊어 내고 호박을 따 드린 적도 있었지요.
더러는 뚫린 구멍으로 밭에서 수확했다고 부추전이나 이런 것을 만들어서 먹어보라고 하실 때에는 정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기도 했지요.
그때는 뉴타운이라기 보다는 재개발이라는 용어가 익숙한 시절이어서 연립을 헐어 내고 새 아파트가 들어 선다고 이제 이사가면 언제 다시 만날 날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씀 하시던 그 날이 기억에 선연 한데, 몇 년이 흘러 아파트 공사도 끝나고 새로운 주민들도 들어서고 경계선에 있던 그 위태로웠던 철망과 담장도 헐어져서 새로운 모습으로 깔끔하게 블록 담장을 새로 만들고 그 담장 위에는 한 줄의 거미줄도 용납하지 않는 CCTV가 설치 되어 벽보다도 마음에 벽을 만들어 버리는 결과가 되고 나도 사무실을 이전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오고 그 동안의 세월이 그렇듯 까맣게 잊고 말았지요.
오늘 아침 새벽 운동을 하기 위해서 주차 후에 가방을 메고 걸어서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 한 분이 물끄러미 바라 보시다가 자네 참 오랜만일세 하고 말을 건네시는 겁니다.
어떤 분이지? 하고 한 참을 생각 한 끝에 아하! 몇 년 전에 헤어지신 바로 그 담장 안에 할아버지!
세월의 흔적을 비켜 갈 수 없어서 노년기의 훈장을 얼굴에 가득 담고 게셨지만 마음만은 행복해 보이시는 잔잔한 미소가 참 아름답게 느껴지더군요.
앞으로 얼마나 사실지? 또 없어져 버린 텃밭으로 인해서 그토록 정성을 들여 가꾸시던 취미를 잃어버린 그 시간을 어디다 투자 하실 지가 궁금하면서 인사를 하고 바삐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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