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장갑.
어느 해 겨울. 아버지의 평소 습관이 그러 하듯이 아무런 연락 없이 나의 집을 방문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집 앞에서 연락도 되지 않은 아들을 기다리면서 얼마나 서성거리셨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날따라 친구들과의 강화 나들이로 초지대교가 생기기 전이라 길이 막힌 다는 이유로 시간을 보낼 겸 해서 어느 갈비 집에 들러서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친구들과 헤어져서 너무 늦게 도착해서 보니 아버지가 문 앞에 계신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화가 나신 아버지를 살살 비위를 맞추면서 애교도 좀 떨고 애들을 시켜서 아양도 부리고 해서 늦은 저녁을 내무장관께서 부지런하게 지어서 저녁진지를 지어 올리고는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손자들이 보고 싶어서 오셨다는 이야기를 웃으면서 듣습니다.
또한 그 작은 가방 보따리에서 아버지께서 앞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서 힘들여 땄을 단감과 말린 나물 몇 가지. 그리고 애들이 먹을 만한 과자 봉지까지 모두 꺼내서 흐뭇한 미소로 좋아라 하는 아이들의 재롱을 보고 계셨습니다.
우린 뭐 하러 이런 걸 예까지 그렇게 힘들게 가져 오셨냐고 말씀은 그렇게 하였지만, 속으로는 아버지의 그 깊은 마음 씀에 한 없는 감사를 드리고 있었지요.
평생을 피워 오신 담배를 몸이 안 좋아 들른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의 한 마디 “어르신 앞으로 담배 계속 태우시면 명대로 못 사십니다” 이 말을 듣고 그 날로 담배를 끊어버리신 아버지의 의지가 대 단 하다는 걸 내가 담배를 끊으면서 느꼈습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그 넓은 집을 혼자 지키시며 계신 아버지의 그 쓸쓸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장남이 아닌 내가 함께 계시자고 해도 아버지의 완고하신 유교 관념에 따라 장남 집도 아닌 곳에 어떻게 내가 있느냐며 한사코 거절하시던 아버지.
혼자 끓여 드실 매 끼니의 식사가 얼마나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이셨는지를 나도 이제 점점 나이 들어 감에 따라 아버지의 그 깊었던 고독의 심연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 가락 하시던 주특기를 가지신 아버지는 어느 모임에나 인기를 가득 모아 주변 분들의 시선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묘한 매력을 가지셨습니다.
노인네의 특성처럼 적당하게 벗겨진 머리.
흰머리 그득하신 곳에 잘 다듬은 콧 수염의 조화로운 이미지가 하얀 양복과 백 구두의 멋을 내신 외출복과 한 곡조 뽑으실 때는 합죽선을 펼쳤다 접었다를 반복하시면서 심청가나 춘향가 한 대목이 흘러 나오실 때면...... 나의 기억 속에는 그런 풍류를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외투 주머니를 뒤적이시더니 검은 가죽 장갑을 하나 꺼내서 나에게 줍니다. 그것은 이미 아버지께서 얼마 동안인지 사용하셔서 낡은 상태 였지만,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실 만한 것은 아마도 이것 밖에 없었지 않나 싶으셨던가 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가 어언 십 년도 훨씬 지났지만 아직도 그 �고 다 닳은, 군데군데 구멍까지 뚫린 검은 가죽 장갑을 지금도 겨울이면 언제나 아버지의 따뜻하던 손인 냥 겨울을 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버릴 수 없는 아버지의 따뜻하신 마음 같은 걸 안고 살아 간다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아들이 군대 가고 나서부터 딸네미의 집 출입이 잦아졌습니다.
딸 아이 말로는 두 분이 적적 하실까 봐 위로차원(?)에서 자주 들린다는 이야기 지만, 어쨌든 딸 아이의 그런 마음 씀이 기특하고 고맙기만 합니다.
지난 번에 와서는 슬며시 내밀 던 선물. 이게 뭐냐 하니까 아무 말도 안 합니다.
그래서 뜯어봤더니 요즘 젊은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명품 가죽 장갑.
고맙고 기특하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제 아버지의 그 따듯했던 마음을 보내 드려야 한다는 걸 생각 하면 가슴이 아픔니다. 그러면서도 한 쪽 눈 끝에는 작은 방울이 맺혀 옵니다.
나도 우리 아버지께 이런 따뜻한 선물을 드린 적이 있었는지 후회도 되고 말입니다.
딸 아이가 봤을 때 사연은 모르지만, 그 �고 다 닳은 가죽장갑을 그리도 애지 중지 하게 사용하던 아빠에게 좋은 가죽 장갑을 사드리고 싶었던 심정이 간절했던가 봅니다.
혹 여러분들은 부모님께 아직 보내드리지 못한 선물은 없으신지요?
추워진 주말 아침 생각 나는 길진이의 넋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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