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치악산 남대봉 바람소리

no pain no gain 2007. 11. 21. 10:33
남대봉 바람소리 가슴에 담고

계절의 속삭임은 배반하지 않지만,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 성남 매표소에서 빙점을 가리키는 수은주의 지표를 실감하면서, 다른 구간은 모두 산불예방의 통제 구역에 묶여 남대봉 건너 영원사로 이어지는 오늘의 산행에 짐짓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강원도의 겨울은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일 년 전 안흥에서 출발. 부곡 매표소에서 곧은 치를 거쳐 향로봉 눈 속에 푹 빠져 남대봉과 영원사 내려가던 그 경사 가파른 암릉 길이 기억에 선연한데, 오늘은 아직 하얗게 덮인 눈이 보이지 않는다.

순조로운 출발. 아직 얼지 않은 계곡의 물 소리가 한 여름을 지나서 일까 힘 찬 물 줄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들려오는 사운드는 차가워진 날씨와 불어오는 바람에 섞여 경쾌하고 맑은 소리까지 묻어난다.
어느 날 밤부터 서서히 얼어 가겠지! 우리가 한 밤 이부자리를 끌어당길 때마다 계곡은 두꺼운 얼음이불로 덮여 가리라.

길이 급하지 않은 트래 킹 코스다 보니 선두부터 속도전이 벌어진다. 얼마간은 다수의 일행이 적당한 간격으로 벌려야 안전산행에 도움이 되리라.
인생도 한 날 한시에 출발했다고 모두 결과가 같다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어디쯤일까? 단종에게 왕위를 빼앗고 사약을 내린 세조는, 한 밤 꿈 속에서 형수인 현덕왕후(문종 비)의 배튼 침을 받고, 악몽에서 깨어 옷을 벗어보니 문둥병인지 부스럼인지 모를 피부병에 도져, 상원사 가는 길에 계곡 물에 들어가 몸을 씻다가 동자승의 도움으로 등을 씻었으나, 좀 창피한 생각이 들어 세조가 나를 보지 못했다고 하라는 부탁을 하자, 그 동자도 문수보살을 봤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는 그 곳이 궁금하다.

외투를 벗고 다시 추슬러서 이세은 차장과 오늘의 최연소 산악인 9살 소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살살 달래고 상원사에 도착하면 초콜릿을 선물로 준다고 약속을 하면서 오르다 보니 어느덧 약수터.

바싹 말라 떨어진 낙엽위로 서설인지 싸락눈의 흔적은 이제 막 겨울의 신고식쯤으로 알면 될까? 서릿발 성긴 길 가에는 밟으면 마치 스펀지처럼 푹 꺼지면서 부서져 내린다.

목이 마른 것은 약수터 한 잔으로 축일 수 있다 하지만, 어이하리 메마른 가슴 타오르는 그 공허는 어느 세월 감로주를 만날 수 있으리까?

좀 더 올라 상원사 일주문을 보자 갑작스럽게 태백산맥의 내용 중 절이 불에 타는 모습이 스크랩되면서 일주문의 타는 불빛에 어둔 밤을 밝히는 지표로 삼아 도망치는 빨치산과 쫏아가는 토벌대의 드라마의 한 장면이 펼쳐지는 듯한 착각이 인다.
상원사 절 집을 구경하러 했으나 이미 영하 10도의 추위 속에 몰아치는 바람은 장갑 속에서 손을 꺼내기도 어렵게 했지만, 불자들의 행렬이 끊긴 연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문들을 모두 잠궈나서 내부를 볼 수 없게 한 인심이 야속타!

치악산의 전설은 하도 여러 가지여서 다만 종에 관한 이야기로 종을 치고 죽은 꿩의 영혼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모든 절들이 본격적으로 타종 하기 전에 가볍게 2번을 쳐 준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용마 바위에 관한 것인데, 예전에 제천 백련사에 본처를 두고 원주 상원사에 첩을 두고 두 집 살림을 하던 어느 주지가, 한 번 달릴 때마다 천리를 간다는 용마를 타고 양쪽 절 집을 오가며 이중생활을 했는데, 이런 사실을 눈치챈 본처가 용마가 힘이 없으면 상원사의 첩의 집으로 가지 못하겠지 하고 먹이는 죽을 조금씩 줄여 주다 보니, 달리던 말이 힘이 떨어져 용마 바위 근처에 와서 말 발 자국과 손으로 짚으면서 흘린 핏자국을 남기고 40m 바위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는 부는 바람에 들리는 이야기를 뒤로 남기고 우린 남대봉으로 간다.

능선에 오르자 마자 불어오는 바람소리.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누구 가슴을 흩고 가는지? 마치 떠나는 님의 발길을 부여잡고 싶은 애타는 마음을 실어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치듯 파고드는 찬 바람은 옷 다 벗고 선 나무들의 애처로운 하소연과 섞여 혼돈의 잡스런 생각까지 모두 흩어내는 듯 하다.

산불감시초소 앞에 이정표 하나. 멀리 향로봉과 비로봉 가는 길이 아스라하게 펼쳐져 있고 희한하게도 남대봉 정상에서 만큼은 한 줌 바람도 불지 않는 명당자리 인지라 수 많은 산 객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는 헬기장의 주변에 앉아 가볍게 간식을 나눠 먹으면서 지난 날의 이야기 꽃을 피운다.

다시 단단하게 채비를 하고 하산 길을 서두른다. 어차피 내려가는 길은 땀도 나지 않을 테니 급할 것 없고 모두가 안전하게 하산해서 지금쯤은 한참 맛있게 끓고 있을 김치찌개에 약주 한 잔 합시다.

내려서다 보니 거대한 암벽 움푹 들어간 곳에 어느 님이 해학일까? 마치 지팡이처럼 바쳐 두었다. 마치 그것을 빼면 바위 산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상상에 지나치는 산객들의 얼굴에 절로 웃음이 돈다.

영원사가 보이는 길목에서 만난 산객들은 도대체 언제 왔는데 벌써 하산 길이냐고 묻지만, 그래도 우린 갈 길이 더 먼 사람들인지라 즐거운 산행 되시라는 인사말로 가름을 한다.

영원사를 지나 시멘트 포장 도로를 따라 금대리 매표소를 지날 즈음 온통 노란 빛을 머금은 낙엽송 그 화사한 낙엽비가 빗 사선으로 떨어지는 장관을 연출한다. 아! 이런 장면은 어느 영화보다 더 화려하다.

여행을 꿈꿀 때 어느 곳을 다녀왔느냐 보다는 누구와 그 장소에서 함께 공유하던 감흥을 느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실감하면서 식당으로 발길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