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달빛 그리고 겨울

no pain no gain 2007. 6. 16. 21:02

달빛 그리고 겨울



달빛이 형광으로 찍힌 것 같던 박꽃들이 이울어 앉으면, 솨르르르, 솨르르르, 늦은 가을 바람이 어두운 잎사귀를 갈며 밟고 지나가는 소리 소슬하게 들리고, 흰 창호지 영창에는 달 그림자 홀로 호젖이 어리어 있는 밤.

시드는 풀밭에서 우는 귀뚜라미 울음은 목을 놓은 달빛의 피리소리라고 나 할까, 가슴을 후비어 파고들며 핏줄까지 투명하게 울리는 소리이다.

수심(愁心)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가을은 나그네가 먼저 듣는다 하고, 가을 바람에 마음 놀란 나그네, 아득히 처자(妻子)를 그려 편지를 쓴다 하는 이런 밤에는, 굳이 나그네가 아니어도 잠들기란 어려울 것이다.
잎 지는 소리가 깨워 놓은 수심을 재우려고, 외로운 베게 돋우괴고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버스럭, 버스럭 마른 낙옆처럼 가슴에 부서질때, 달이나 보자하고 홀연 영창을 열면,

아아, 언제 저토록 서리가 내렸는가.

순간 놀라게 한다.
마루와 댓돌과 뜰에, 시리도록 싸늘히 깔린 달빛의 희고도 푸른 서슬은 영락없는 서리 여서, 몇 번을 다시 보게 하는 것이다.

밟으면 검은 발자국 묻어날 것 같아 차마 밟지 못하고 멀리 눈을 들면, 기러기 울음 흐르는 하늘에 달 하나, 서리 빗긴 상월(霜月)이 처연히 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달빛이라면, 역시 한겨울 깊은 밤의 달빛이리라.
촉촉하게 피어나는 꽃잎도, 향훈(香薰)도, 우거진 잎사귀도, 꽃보다 더 곱다는 단풍도 이미 흔적 없이 사라진 대지의 깡마른 한토(寒土)에, 나무들은 제 몸을 덮고 있던 이파리를 다 떨구어 육탈(肉脫)하고 오로지 형해 로만 남은 겨울.

겨울은 사물이 살을 버리고 뼈로 돌아가는 계절이다.

그대는 가졌는가 이런 달빛 같은 친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