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이어서 우리 5학년 1반 심장순 선생님께서 들려주시던 이야기 한편 더.
운 봉하면 남원 출신이면 누구나 다 아는 지명인데, 그럼 황산대첩비라 하면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래요 그날도 학과가 끝나고 잠깐의 여유시간이 돌아와 초롱 한 눈망울을 반짝이면서 우리 모두는 선생님의 입 모양만 바라보면서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오늘은 아지발도 이야기를 해 주겠다 하시면서 말문을 여셨다.
이야기 는 자료를 참고로 했습니다
고려시대는 우리민족사에서 왜 침이 가장 많았던 시기로 총 484회에 걸친 왜침 있었다. 고려 말 에는 왜구의 침입이 대규모화 해졌으며 횡포 또한 잔인해졌다. 때는 1376년(우왕 4년) 5월 대마도(對馬島)로부터 왜군이 대거 침입하였는데, 1376년 7월에는 공주를 점령하고 약탈과 방화를 일삼다 최영 장군에 의하여 홍산에서 크게 패하여 도주하였으나 그 해 9월 전주지방으로 다시 침입하여 약탈과 방화, 살인 등 온갖 횡포를 부리고 있었으며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 장군을 삼도통사로 임명하여 이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왜구 토벌에 본격적으로 나선 이성계 장군은 지리산일대에서 활동중인 왜구를 상대로 가는 곳마다 크게 적을 격퇴시켜 그 용명(勇名)이 날로 높아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왜구는 1380년(우왕 6) 8월 금강하구 진포(鎭浦: 지금의 서천∼금강 어귀)에 500여 척의 함선(艦船)을 끌고 와 충청·전라·경상의 3도 연해 주군을 마구 약탈 살육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고려에서는 원수 나세(羅世)·최무선(崔茂宣)이 화통(火筒)·화포(火砲)로써 왜선을 모조리 불태우고 많은 왜구를 수장하였다. 그러자 이때 목숨을 구한 360여명의 왜구가 옥주(沃州: 지금의 옥천)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적들과 합류하였는데, 선박이 소실 당하고 퇴로를 잃게 되자 상주·영동·옥주 등지로 진출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때 상주 방면으로 진출한 왜구의 주력부대는 다시 경산(京山:지금의 성주)을 침략하고 사근내역(沙斤乃驛: 지금의 함양)에 집결, 대규모 공세를 가하였다. 이에 고려군은 배극렴, 김용휘, 지용기, 오언, 정지, 박수경, 배언, 도흥, 하을지 등이 왜구를 추격, 토벌하고 있었으며 작전기간 중 박수경과 배언을 포함하여 500여명의 군사가 전사하는 등 피해가 속출 하였다.
왜구는 계속하여 다음달인 9월 남원 운봉현(雲峰縣)을 방화하고, 인월역(引月驛: 지금의 남원 인월리)에 주둔하면서 장차 북상하겠다고 하여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이에 고려의 조정에서는 지리산과 해주 방면에서 왜구를 토벌하여 용맹을 떨친 이성계를 양광(楊廣)·전라·경상 삼도 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에 임명하고, 변안열(邊安烈)을 체찰사(體察使)에, 우인열(禹仁烈)·이원계(李元桂)·박임종(朴林宗)·도길부(都吉敷)·홍인계(洪仁桂)·임성미(林成味) 등을 원수로 삼아 왜구 대토벌 작전에 나서게 하였다.
이에 왜구들은 지리산을 넘어 운봉 인월역에 주둔하면서 광주를 거쳐 도망치려 하였다. 왜구와 고려군은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의 정산봉(鼎山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왜구들이 험지에 자리잡고 버티자 이성계가 산 위로 올라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자 모든 군사가 총공격을 하여 일대격전을 치루였으며 그러나 왜군의 우두머리인 아지발도는 15세의 소년으로 힘과 무예가 비범하며 머리에 철로 만든 투구를 써서 아무도 이를 해칠수 없었다. 이에 도 순찰사로 임명된 이성계가 신궁이었던 그의 활 솜씨로 적장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아 벗긴 후 과거 여진족 부족장이었던 이성계의 의동생 이지란이 벗겨진 이마를 향해 즉시 화살을 쏘아 죽였다. 왜구는 우두머리가 죽자 오합지졸 도주하게 되었으며 고려군은 도주하는 왜구를 추적하여 모조리 주살하니 왜구는 이곳에서 전멸하였다. 이 때 전사한 왜구의 피로 강이 물들어 6, 7일간이나 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하며,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고 병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적군이 아군보다 10배나 많았으나 겨우 70여명만이 살아 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 이와 같은 이성계의 황산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함께 왜구 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것이며, 그 뒤부터 왜구의 세력이 쇠퇴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고려의 왜구 대책은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듬해 다시 이곳을 방문한 이성계는 자신과 휘하 장수의 이름을 암벽에 새겼으니 이것이 어휘각이다. 2백년 뒤인 선조 10년(1577)에는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의 상소에 의해 황산대첩을 기념하는 비석이 현재의 자리에 세워졌다. 그러나 지금 어휘각과 대첩비는 그 잔해만이 남아있고 일제에 의하여 깨어진 대첩비는 현재 정각 안에 보관되어 있다.
● 관련된 전설과 뒷이야기 운봉 일대에는 황산대첩과 관련한 지명이 많이 유래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피바위, 인월, 군마동, 인풍리 등이다. 피바위는 황산대첩비에서 인월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남천변에 있는데 당시 왜구들이 흘린 피로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하여 붙여진 것이며, 인월은 날이 저물어 도망가는 왜구를 쫓아 달을 당겨놓고 밤늦게까지 싸워 전멸시킨 것이에 유래하였고, 인풍은 이성계가 바람을 몰고 다니며 싸웠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황산 부근에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토성이 있고, 당시 군대가 주둔할 때 말을 매어 놓은 곳이라 하여 군마동이라 하였다.
왜구 적장 아지바두란 말은 우리가 듣기에는 아지발도로 들었었는데, 이는 몽고말로 아지는 어린이란 뜻이고 바두는 용명무쌍함을 뜻하는 말이라 한다.
즉 어린 소년이 매우 용맹 무쌍하다는 뜻의 장수란 이름이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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