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흘산 안개 속을 헤 메이다.
예보에 의하면 큰 비가 예상된다는 영남. 어둠을 헤치고 새벽을 열면서 달리는 그 순간 만은 모든 것이 잠잠하였는데, 휴게소에 내려 보니 서서히 먹구름과 함께 작은 빗방울이 내리고 있다.
문경에 도착 제1 관문을 지날 때쯤에만 해도 멀리 산 정상을 감싸고 있는 희뿌연 구름만 흘러가고 있었는데, 계곡 물소리가 이젠 봄을 노래하듯 옥타브가 명랑조로 바뀌었다.
몇 개의 작은 소와 폭포를 거쳐 앞서가는 사람이 주춤거린다 싶은 지점에 여성의 가장 은밀한 그 곳을 닮았다는 바로 그 폭포.
전설에 의하면 7선녀가 구름 타고 내려와 목욕을 하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여궁(女宮)폭포를 마주하면서 20여 미터의 높이에서 거세게 쏟아지는 이 형상을 선인들은 어떤 상상 속에 그려 냈을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지나간다.
때론 깎아 지른 듯한 절벽 앞에서 또 까마득하게 보이는 벼랑 끝에서 잘게 부서진 돌 자락을 밟고 지나가다가 자칫 물에 젖은 뿌리를 미 끌리는 순간이면 그 질컥이는 흙 길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저 오늘의 산행이 안전하게 이루어주십사 빌어본다.
물길을 돌아 희뿌연 안개를 헤치자 어느 틈에 나타난 혜국사.
통일신라 말기에는 극히 혼란스런 정쟁으로 치달아 신라 왕족출신으로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궁예.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고 했던가? 마치 초한지의 항우 같은 인물로 지방 호족 출신이면서 유방의 성격을 닮은 왕건에게 참패를 당해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 버린 인물.
이에 반해 왕건은 호족의 뜻을 너무도 잘 알아 고려를 세우고 국고가 더 필요한 시기임에도 세금을 깎아주는 정책을 폈던 인물.
호족들의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29번의 결혼을 하고 23명의 왕비가 호족의 딸이었을 정도며 그러다 보니 일주일에 한번 꼴로 자녀들의 생일잔치가 빈번했다는 바로 그 인물.
군인출신이면서 공송찬처럼 뛰어난 지략을 가진 후백제의 견훤을 무릎 꿇리고 고려를 세우면서 제1성으로 대동강 경계로 이루어진 국경을 북진정책으로 여진을 물리치는 영토확장의 정책을 폈던 호기로운 왕건의 무대가 바로 문경의 주흘산에 있다.
세월이 흘러 고려 말 공민왕 시절에는 홍건적의 난을 피해 잠시 숨어든 절이 바로 문경의 혜국사라 한다. 왕이 은혜를 입어서 이름을 바꿨다 뭐라나?
뿌옇게 보이지 않던 안개비는 어느덧 가랑비에 옷이 젖는 다는 말처럼 서서히 젖어온다.
수백 년은 되었음직한 홍송의 그 믿음직한 거송을 하나 둘 지나면서 보니 온통 아름드리가 넘는 숲의 절경이다.
더러는 30미터가 넘는 듯 미끈하게 쭉 뻗은 전나무도 가히 일품이지만 참으로 그 긴 세월을 화마 한번 안 당하고 굳센 숲으로 남아있다는 것이 산업화의 물결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이 현실 앞에서 자손만대까지 물려주어야 할 귀중한 자연유산이 아닌가 한다.
올라가면 갈수록 질컥거리는 등산로는 마치 팥죽을 쑤다가 잠시 쉬는 듯한 모습으로 남아 자나가는 길손의 발길을 자꾸만 부여잡는다.
거추장스럽게 걸친 우비와 연신 미끄러지는 발길에 정상을 코앞에 두고 하산하기로 한다.
안전상 후퇴는 이럴 때 쓰는 말(?)
내려서면서 둘러보니 한 여름이면 물가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풍경이 너무도 멋질 것 같은 오래되 정원의 한 화폭처럼 늙은 나무등걸에 걸터앉은 이끼가 새파랗게 피어올라 고색창연의 신비감을 더하는데, 옛 선비들의 한양 나들이가 이 같은 정서가 있었으랴 하는 위안을 삼아 터벅이면서 몇 장의 사진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오늘이 시산제라 일년산행의 무사고를 천지신명께 고하고 산신령에게 비는 마음으로 준비한 정성을 어떤 이는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라 즐겁다 하건만, 어째 바람까지 거세지고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다 보니 준비한 사람들의 노력이 아쉽기만 한 대목이다.
정성 들여 준비한 진행요원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보내고 기원한 바와 같이 금년 한해 산행인 모두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맘과 같이 올 한해 모두의 행복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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