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칼바위 능선에서 장군봉을따라 가면....
아 언제였을까 한 5 ~ 6년 전에 중학생 아들 손잡고 서울대 입구를 거쳐 관악산을 오른적이있었는데, 그 아들이 지금 대학생이 되었으니
세월의 무상이 실감나기도 하려니와 서울의 정기를 받으려면 관악산을 꼭 한번 올라야 겄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찾게 되었다.
안양 방면이나 과천 방면에서 오른 적도 더러 있었으나 서울대 입구에서 오른적은 하도 오래전의 일이라서 다시 찾게 된 것이었지요.
서울대 입구에서 관악산을 타고 초입으로 들어서니 예전에 보았던 풍경이 아니다.
초입부터 고소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던 그 많던 막걸리며 파전을 굽던 행상들이 모두 어데로 가고 그 자리엔 고스란히 평상을 만들어 두고
호수공원까지 만들어져 지나가는 길손의 발길을 부여 잡는다.
아! 이곳엔 언제나 민주화가 되어 저 자리가 정화 되려나 했는데, 안와본 사이에 나도 모르게 고스란히 깨끗하게 달라진 모습이 생소하기만 하다.
그 좁아터진 길을 막고 길게 평상을 내 놓고 먹거리를 즐비하게 깔아서 오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부여 잡고 왁자하게 떠들던
그 시절의 나그네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가고?.....
이번에는 안가본 우측 능선을 타고 성주암 방면으로 접어 한참을 오르다 보니 웬 바위봉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그래 여기 한번 가보자.
가는 길 바로 옆에서 장끼의 후다닥 놀라 줄행랑치는 뒷태를 보면서 자연이 살아나고 있음을 실감하고, 얼마쯤 올랐을까 발아래 민가가
보이면서 태극기가 휘날리는 정상? 아니 이게 정녕 끝이란 말인가?
다시 내려와서는 좌측 능선을 방향으로 잡고 화강암으로된 칼바위 방면으로 오르다 보니 숲길을 지나면서 부터는
올망졸망한 암벽들이 가로막고 작은 릿지를 요구한다.
또 다시 휘날리는 태극기 하나를 지나고, 사방이 탁트인 바위에 앉아 서울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장군봉에서 물 한모금
마시면서 산천을 둘러본다.
문헌에 보면 조선을 세울때 이성계의 명에의해 한양천도에 관하여 무학대사는 관악산을 정남쪽에 두고 왕궁을 지으면
그 화성(火性)에 눌려 내우외환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나 개국공신 정도전은 한강이 가로막고 있어 火氣가 오지 못한다고 주장 하였다.
태종은 정도전의 손을 들어 주었고, 이성계는 관악산에 연주사와 원각사 두 절을지어 화환에 대처 하였으며, 관악산 중턱에는
큰 물동이를 묻었으나 그후 1,2차 왕자의 난, 단종/사육신의 죽음등 조선의 역사는 피바람이 많았으며 경복궁도 자주 화재를 만났다.
그래서 관악산은 화악산(火岳山)이라 하고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을 재건할 때 돌로 해태를 만들어 광화문 앞 양쪽에 배치하였고
관악산에 우물을 파서 안에 구리로 만든 龍을 넣음으로서 火氣를 방지하였다.
몇 년 전엔가 뉴스에서 나온 이야기를 유추하면 경복궁 경회루 물을 빼니 커다란 구리 용이 나와 세간의 이목을 집중하던
일이 있을 정도로 이와같이 관악산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화덕을 가진 「불기운의 산」으로 전해진다 한다.
다시 걸어서 삼성산쪽으로 방향을 잡고 산길을 걷다보니 어느 님의 노래인가 나그네에 대한 상념이 떠오른다.
그대여 어디서 왔는지 묻지 마오
물 건너 산 너머 길이 있기에
굽이굽이 산길 따라 멀리서 왔소이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지도 마오
그저 가야만 하기에 가고 있소이다
쉬었다 가라고 붙잡지 마오
먼길을 떠나야 하는 나그네의 발길
붙들어 맬 수 없는 것
바삐 서둘러 가야 할 길은 아니지만
해 저물기 전 그 곳을 향해 가야만 하오
머물 곳이 있냐고 묻거든 나는 말하리라
발끝 닿는 그곳에 내가 머물 산천이 있다고.
발끝 닿는 그곳에 내가 머물 산천이 있다고.
< 如山 김지명님의 나그네 >
삼성산을 지나 삼막사를 가는 길에 반월암 근처에서 마애부도를 보다.
예전에 어느 친구와 이곳을 등반하다가 어느 길손이 부도에 뚫려있는 구멍에 돌을 던져 올려 놓을 수 있다면 귀한 아들을
얻을 수 있다 하여 호기심에 돌을 던져 보았던 곳.
그 앞에는 귀중한 문화유산을 훼손하지 말자는 안내문이 서 있다.
반월암에 들러 떨어진 물동냥을 하러 들려서 잠시 쉬다보니 하늘이 컴컴해지는 모양이 저구름이 그냥 가지는 않을 기세다.
우비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 발길을 돌려 서둘러서 하산을 한다.
계곡을 타고 내려오면서 물소리 바람소리 좋기는 한데, 군데 군데 시퍼렇게 살아있는 용이라도 방금 박차고 올라 올 것같은
시퍼런 물도 보이고 제법 낙차가 커서 물떨어지는 소리도 힘차게 들리는 비탈길을 서둘러서 한두 방울 씩 떨어지는 빗방울에 박자 맞추면서 부지런하게 내려 왔다.
생각 같아서는 깊고 깊은 심신산천이라면 바지라도 벗고 들어가서 신선이라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저 맑고
깨끗한 물에 행여 귀를 씻은 물이라도 오명이 될까하여 그냥 지나친다.
숲이 어둡고 캄캄하다보니 눈앞에 어른거리는 깔따구(?) 들이 극성을 부려 더러는 눈속에 들기도 하고 더러는 입으로 그 귀한
단백질이 들어오기도 하였지만, 저것도 미물일지라도 생명이 있는 것이라 피 할 수 없다면 기쁜 마음으로 벗하며 하산을 서둘렀다.
다시 초입 부근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석양의 햇살이 길게 비추는 이 더운 여름날의 땀 흘리는
등산이 즐거운 유월의 유쾌한 하루 였습니다.
아 언제였을까 한 5 ~ 6년 전에 중학생 아들 손잡고 서울대 입구를 거쳐 관악산을 오른적이있었는데, 그 아들이 지금 대학생이 되었으니
세월의 무상이 실감나기도 하려니와 서울의 정기를 받으려면 관악산을 꼭 한번 올라야 겄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찾게 되었다.
안양 방면이나 과천 방면에서 오른 적도 더러 있었으나 서울대 입구에서 오른적은 하도 오래전의 일이라서 다시 찾게 된 것이었지요.
서울대 입구에서 관악산을 타고 초입으로 들어서니 예전에 보았던 풍경이 아니다.
초입부터 고소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던 그 많던 막걸리며 파전을 굽던 행상들이 모두 어데로 가고 그 자리엔 고스란히 평상을 만들어 두고
호수공원까지 만들어져 지나가는 길손의 발길을 부여 잡는다.
아! 이곳엔 언제나 민주화가 되어 저 자리가 정화 되려나 했는데, 안와본 사이에 나도 모르게 고스란히 깨끗하게 달라진 모습이 생소하기만 하다.
그 좁아터진 길을 막고 길게 평상을 내 놓고 먹거리를 즐비하게 깔아서 오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부여 잡고 왁자하게 떠들던
그 시절의 나그네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가고?.....
이번에는 안가본 우측 능선을 타고 성주암 방면으로 접어 한참을 오르다 보니 웬 바위봉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그래 여기 한번 가보자.
가는 길 바로 옆에서 장끼의 후다닥 놀라 줄행랑치는 뒷태를 보면서 자연이 살아나고 있음을 실감하고, 얼마쯤 올랐을까 발아래 민가가
보이면서 태극기가 휘날리는 정상? 아니 이게 정녕 끝이란 말인가?
다시 내려와서는 좌측 능선을 방향으로 잡고 화강암으로된 칼바위 방면으로 오르다 보니 숲길을 지나면서 부터는
올망졸망한 암벽들이 가로막고 작은 릿지를 요구한다.
또 다시 휘날리는 태극기 하나를 지나고, 사방이 탁트인 바위에 앉아 서울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장군봉에서 물 한모금
마시면서 산천을 둘러본다.
문헌에 보면 조선을 세울때 이성계의 명에의해 한양천도에 관하여 무학대사는 관악산을 정남쪽에 두고 왕궁을 지으면
그 화성(火性)에 눌려 내우외환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나 개국공신 정도전은 한강이 가로막고 있어 火氣가 오지 못한다고 주장 하였다.
태종은 정도전의 손을 들어 주었고, 이성계는 관악산에 연주사와 원각사 두 절을지어 화환에 대처 하였으며, 관악산 중턱에는
큰 물동이를 묻었으나 그후 1,2차 왕자의 난, 단종/사육신의 죽음등 조선의 역사는 피바람이 많았으며 경복궁도 자주 화재를 만났다.
그래서 관악산은 화악산(火岳山)이라 하고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을 재건할 때 돌로 해태를 만들어 광화문 앞 양쪽에 배치하였고
관악산에 우물을 파서 안에 구리로 만든 龍을 넣음으로서 火氣를 방지하였다.
몇 년 전엔가 뉴스에서 나온 이야기를 유추하면 경복궁 경회루 물을 빼니 커다란 구리 용이 나와 세간의 이목을 집중하던
일이 있을 정도로 이와같이 관악산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화덕을 가진 「불기운의 산」으로 전해진다 한다.
다시 걸어서 삼성산쪽으로 방향을 잡고 산길을 걷다보니 어느 님의 노래인가 나그네에 대한 상념이 떠오른다.
그대여 어디서 왔는지 묻지 마오
물 건너 산 너머 길이 있기에
굽이굽이 산길 따라 멀리서 왔소이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지도 마오
그저 가야만 하기에 가고 있소이다
쉬었다 가라고 붙잡지 마오
먼길을 떠나야 하는 나그네의 발길
붙들어 맬 수 없는 것
바삐 서둘러 가야 할 길은 아니지만
해 저물기 전 그 곳을 향해 가야만 하오
머물 곳이 있냐고 묻거든 나는 말하리라
발끝 닿는 그곳에 내가 머물 산천이 있다고.
발끝 닿는 그곳에 내가 머물 산천이 있다고.
< 如山 김지명님의 나그네 >
삼성산을 지나 삼막사를 가는 길에 반월암 근처에서 마애부도를 보다.
예전에 어느 친구와 이곳을 등반하다가 어느 길손이 부도에 뚫려있는 구멍에 돌을 던져 올려 놓을 수 있다면 귀한 아들을
얻을 수 있다 하여 호기심에 돌을 던져 보았던 곳.
그 앞에는 귀중한 문화유산을 훼손하지 말자는 안내문이 서 있다.
반월암에 들러 떨어진 물동냥을 하러 들려서 잠시 쉬다보니 하늘이 컴컴해지는 모양이 저구름이 그냥 가지는 않을 기세다.
우비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 발길을 돌려 서둘러서 하산을 한다.
계곡을 타고 내려오면서 물소리 바람소리 좋기는 한데, 군데 군데 시퍼렇게 살아있는 용이라도 방금 박차고 올라 올 것같은
시퍼런 물도 보이고 제법 낙차가 커서 물떨어지는 소리도 힘차게 들리는 비탈길을 서둘러서 한두 방울 씩 떨어지는 빗방울에 박자 맞추면서 부지런하게 내려 왔다.
생각 같아서는 깊고 깊은 심신산천이라면 바지라도 벗고 들어가서 신선이라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저 맑고
깨끗한 물에 행여 귀를 씻은 물이라도 오명이 될까하여 그냥 지나친다.
숲이 어둡고 캄캄하다보니 눈앞에 어른거리는 깔따구(?) 들이 극성을 부려 더러는 눈속에 들기도 하고 더러는 입으로 그 귀한
단백질이 들어오기도 하였지만, 저것도 미물일지라도 생명이 있는 것이라 피 할 수 없다면 기쁜 마음으로 벗하며 하산을 서둘렀다.
다시 초입 부근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석양의 햇살이 길게 비추는 이 더운 여름날의 땀 흘리는
등산이 즐거운 유월의 유쾌한 하루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