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색 눈사람. 최윤作. 1992.
우리가 '절망의 시대'라고 통칭하던 시간과 공간이 있었다.
오래된 신문기사 중.
<뉴욕의 센트럴파크에서 죽은 여인. 오래전에 무효가 된 강하원(41세)라는 이름의 여권. 불법체류자이며 쇠약에 의한 아사.>
엄마는 이모에게 맞기고 미군 운전병을 따라 미국으로 갔고,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해 검정고시로 간 대학입학금을 위해 이모가 이모부의 병원비를 위해 땅판돈을 훔쳐 달아난 처지. 분에 넘치는 학교. 등록과 휴학을 번갈아 하다가 알렉세이 아스타체프의<폭력적 시학: 무명 아나키스트의 전기>라는 중고책과 헌책방에 매개로 어정쩡 하게 인쇄소에서 일을 하게 된다. 밤에 피는 꽃처럼, 밤에만 돌아가는 인쇄소. 비밀하게 찍어내는 책. 완성되기 전에 급습을 당한다.
갑작스럽게 도착한 엄마의 편지.
그리워한것은 아니지만, 발작적으로 보낸편지로 초청장과 여권신청절차를 밟는다. 그리고 받은 여권.
인쇄소의 모든 사람들이 흩어진 뒤. 김희진이라는 조금 섬뜩한 아름다움을 지닌 얼굴의 여인의 방문을 받는다. 편지에는 여권을 빌려달라는 내용이 전부다.
" 나는 가끔 희망이라는 것은 마약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이 무엇이건 그 가능성을 조금 맛본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그것에 애착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이 꺾일 때는 중독된 사람이 약물 기운이 떨어졌을 때 겪는 나락의 강렬한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에 희망에의 열망은 더 강화될 뿐이다. 김희진이 도착하던 날, 그녀의 피곤에 지쳐 눈 감긴 얼굴을 쳐다보면서 나는 내가 이미 오래전부터 나도 모르게 그 성격을 규정하기 어려운 희망이라는 것에 감염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어떤 형태로든 일생 동안 나를 지배하리라는 것도, 나는 막연한 희망에 대한 막무가네의 기대로 김희진을 돌보았다."
김희진은 김포공항으로 해서 미국으로 떠난다.
그녀는 여닐곱장의 편지와 가방 가득히 무언가를 남기고. 위조된 여권을 들고.
그후 발신인도 주소도 없는 엽서 한 장.
"강양, 고맙소."
그 사이 '안'은 유명한 민중 예술가이자 운동가가 되어 수차 강연을 다닌다.
" 그 시절의 아픔은 어쩌면 이리도 생생 할까. 아픔은 늙을 줄을 모른다. 아픔을 치유해줄 무언가에 대한 기구가 그만큼 생생하고 질기기 때문일까. 호색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 며칠 전에 지구를 뜬 그녀의 별에 전파가 닿게끔 머리에 긴 가지로 안테나를 꽂고...... 그러나 사람이 죽은 다음에 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아이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아프게 사라진 모든 사람은 그를 알던 이들의 마음에 상처와도 같은 작은 빛을 남긴다."
인생의 한 페이지 쯤.
무한의 공포와 쫓기는 숨막히는 장면들이 블럭처럼 조립되고 뇌세포를 점령당한 시절의 상처를 소유한 사람들이 품어내는 지독한 향기를 잠깐이나마 엿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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