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 정지아 作. 2008.
치매걸린 노인이 개나리 앞에 웅크리고 앉아 짧아지는 봄빛을 아쉬워하는 그림이 그려진다.
치매걸린 남편 앞에서 아낙의 한없는 넋두리를 풀어낸다.
야학을 갔다고 작대기로 두둘겨 패는 아버지. 홀연히 나타나 색시로 달라는 남편. 야밤도주해서 일본에가서 원없이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에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혀서 머리깍고 족두리쓰고 시집온 아낙. 공부하고 싶다는 말에 책한권 던져줘서 첫날밤에 가갸고교를 배우던 아낙.
남편은 혁명전사로 평등한세상을 만들어보겠다고 산으로가고, 임신과 출산으로 아기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애를 업고 토벌대에 쫓겨서 산으로 눈길을 헤치고 갔으나 애는 죽고만다.
남편의 옥바라지로 서글픈 세상. 그런데 그 무엇보다도 냉정한 남편이 제일서럽다. 오공오 털실로 짠 옷은 젊은 혁명가한테 주고, 오분의 면회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뒤돌아선 남편.
그래도 행복했던건 시장에 갔던 남편이 툭 던져주는 봉지에는 생선토막이나 사과도 들어 있어 시장에는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오거리 과부집에서 본 모습은 집에서 짓지않던 흡족한 미소로 과부의 통통한 엉덩이를 두들기던 그 남편.
산에서 배곯아본 기억의 보상이라고 삼시세끼 밥상에 술담배는 끊이지 않고, 잠자리에서의 다정함은 없이 코를 드르렁거리면서 잠이 들었다가도 새벽녁이면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밖으로 나돌던 남편.
그러면서 늙었다.
" 살아봉께 말이어라. 시간은 앞으로만 흘르는 것이 아니고라, 멫 살부텀이었능가는 몰라도라, 옛 기억들이 시방의 시간 속으로 흘러 들어서라. 앞 도 지도 읎이, 말하자먼 제 꼬리를 문 뱀맹키 말이어라. 나는 말이어라, 갇힌 시간 속에서 살아온 날의 기억을 뒤씹는 한 마리 소가 된 것맹키어라. 이럴 중 알았으면 말이어라. 날 서고 아픈 기억 말고라, 되새기기 좋게, 되세기면 함박웃음이나 벙그러지는 말랑말랑 보들보들, 그런 기억이나 맹글어서라, 요리 벹 좋은 날에 벹 속에 나앉아 따독따독, 이삔 기억이나 따독임시로 따순 아지랑이로나 모락모락 피어올라 이승과 작별했으면 안 좋았것소이. 누군들 그리 살고 싶지 않았겄어라. 그리 살고 싶어도 안 되는 것이 시상지사라".
"영감. 그 좋아하던 소주도 인자 싫소? 제우 한잔 묵고 마다요? 차라리 잘됐소. 만난 것도 잊어 불고, 좋던 것도 잊아불고, 그립던 것도 다 잊아 불고, 올 때맹키로 홀가분이 가씨요. 징헌 기억일랑 저 아지랭이 맹키 날레불고 말이어라. 영감, 보이요? 민들레 꽃씨가 난리 그만이라. 자요, 영감? 그리 자고 또 자요? 거기는 워떻소? 꿈도 없이 다디단 이녘의 잠 속은 워떤게라. 나도 잠 델꼬가씨요. 나도 이녘이랑 한날 한시에 갈라요. 혼자 된 딸년이 걸리기는 하지만 인제 다 컸응게 원도 한도 없소. 항꾼에 갑시다. 가설랑은 다시 안 올라요. 암만 존 시상을 준다개도 나는 싫어라. 이녘 각시로도 싫어라. 무정한 이녘이 싫어서는 아니고라. 이만허먼 됐소. 말로는 못해도라. 나는 알 것만 같그만이라. 생명이란 것에 애달븐 운맹을 말이어라. 헥멩도 뭣도 아니고라. 생명은 말이고라. 살아봉게 애달프요. 짠하고 애달프요. 긍게 우리, 허공중에 산산이 흩어져, 생명 가진 잡초로 도 말고라, 사램으로도 말고라, 뵈도 않는 먼지 같은 것으로나 날리먼 나서 말이어라, 슬픔도 없이 기쁨도 없이, 여기저기로 떠돔시로나, 암껏에도 맘 주지 말고 말이어라, 시시허게 고로코롬 사라블라라먼 살아보든가요. 벹이 좋소. 짜울짜울, 나도 잠이 와라, 안 깼으면 좋겄소. 이냥 이대로 봄벹 속에 잠을 잠시로 다시는......"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세상만물 모든것들이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것은 변함 없는 '세월'이다.
'늙으면'으로 통용되는 단 하나의 법칙.
그 세월 앞에서는 누구나 겸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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