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정. 정지아 作. 2008.
배강우. 머슴의 자식. 할아버지도,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종이었으며, 대를 물려 축적되어온 나약하고 순종적인 성품 때문인지 그는 그 질긴 업을 사는 일이 다 그러려니,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가난때문에 16살에 14연대에 입대하였고, 성품때문에 2700명 중의 하나인 반란군이 되었고, 지리산 왕시루봉에서 쫓기고 배고프고 지쳐서 죽던 동료들 사이에 식량을 구하러 간다고 하자 마지막 남은 쌀 한줌을 내주던 이현상사령관. 가슴까지 차오르던 눈길을 헤치고 7키로를 걸어서 살던 동네에 도착. 하염없이 울다 지쳐서 잠들었던 그가 깨보니 순경인 당숙과 부모가 그를 붙잡았다.
자수만 하면 감옥에도 안가고 살려준다고 한다.
떠나기 전에 이현상은 말한다. "강우야, 살길을 뿌리치지 마라". 22살의 강우는 순경이 되었다.
빨치산 기세가 등등 하던 1949년 봄. 보급투쟁을 성공리에 마치고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던 오락회에서 강우는 풀피리를 불었다. 이현상이 물었다. 세상에서 뭐가 제일 좋은지. 꽃이 제일 좋그만이라. 시상 사는게 다 그러니께요, 꽃도 사램도 짐승도 어짜피 다 죽을 목심이잖애라, 꽃이 지는 걸 보믄 워짠지 맴이 짠허고, 글다보믄 나도 짠허고, 글그마요. 강우동무는 예술공부를 해보는 게 좋겠소. 동무 풀피리 연주나 들읍시다. 저기서 들으니 거 좋더구만. 마음약한 강우가 고향집에 가면 정에 붙들릴 것을 이현상은 알았을 것이라는 걸. 환갑이 지난 뒤에야 이해를 했다.
눈내리는 겨울. 오거리에 있는 과부집에서 막소주로 지난 세월을 추스려보는 허망한 상념. 댓살많은 고순경과 술친구로 보낸 시간들. 순경을 하다가 빨치산에게 잡혀서 순경을 그만두기로 살아난 고순경.
술취한 넉두리.
" 선상님 나를 잡지 그랬소. 나가 못 올 줄 알았으면 나가 이리 살 줄도 알았을 것 아니요. 산 것보담도 못한 인생이라도, 그래도 살라고 나를 보냈소? 참말로 독허요이. 선상님이나 그래 살아보지 그랬소."
혼자 중얼거리며 그는 탁자에 얼굴을 묻었다. 아버지처럼 따스하던 이현상의 마지막 눈빛이 사라지고, 옥희 누님의 목화솜 같은 환한 웃음도 아득히 멀어졌다. 그 너머로 옥희 누님의 웃음을 닮은 목화 송이 같은 함박눈이 퍼붓고 있었다. 눈 사이로 스물둘의 젊은 그가 걷고 있었다. 왕시루봉을 넘을 때 그는 왜 그랬는지 퍼붓는 눈 사이로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돌아본 것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천국이 었다. 천국은 미래에 있지 않고 청춘을 바친 그 산속에 있다는 것을 젊은 그는 알지 못했다. 신념 때문이었든 함께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든 목숨을 건 청춘 자체가 천국이었다는 것을 취한 그의 의식 속에서 젊은 그가 천국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창 밖의 눈은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의식 이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그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납두씨요. 눈조차 저래 오는디 워치케 델꼬 갈라요. 다 늙은 년 소문 나봐야. 뭣이 달라지겄소.여개서 재우지라 뭐."
"미친눔, 넘들은 손바닥 뒤집디끼 요리조리 옮겨다님시롱도 잘만살들만, 뽈갱이도 지대로 못 돼본 놈이 펭상을 이것이 먼 짓이다여."
찬 소주를 입에 탁 틀어 붙자 오소소 한기가 들었다. 과부댁과 고순경은 우두커니 앉아 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이 주먹만 한 눈송이가 직선으로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눈송이가 어찌나 굵은 지 뒷산은 물론 건너 편 집 조차 눈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퍼붓는 눈 사이로 느릿느릿 시간이 흘러갔다. 눈은 종일 토록 내릴 모양이었다.
인생에 가장 화려했던 봄날. 화양연화가 있었다면 당신의 천국은 언제인가요? 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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