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신. 전광용作.
은애. 여학교의 낡은 교복을 벗어 버리고, 새로 지은 투피스로 갈아입은 홀가분한 감촉, 이제는 참말 어른이 되어 가는가 하는 환각마저 느꼈다.
앞으로 일주일만 있으면 프레시맨의 새로운 코스가 시작된다 왼쪽 가슴 볼룩한 가슴에 달아놓은 대학 배지, 누구에게나 보이고 싶게 자랑스러웠다. 그의 가슴은 새로운 봄의 환희와 희망에 젖어 부풀어 올랐다. 세상의 온갖 것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오늘 이 모든 것이 자기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까지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학보병으로 입대한 애인, 전날 밤 둘은 밤늦게까지 같이 있었다. 일년 반의 군복무. 그것은 아득하게 긴 세월만 같이 느껴졌고 은혜에게는 다시 만나지 못할 번 길 떠나보내는 결별 같은 아쉬움이었다.
사랑, 이런 때묻은 속된 말로 표현하기엔 자기들의 순종 교류가 욕되게 일컬어지는 것만 같게 여겨졌다. 그만큼 둘의 아낌이나 그리움은 거룩하고 또 순결한 것이라고 느껴졌었다.
6.25 때 희생된 아버지, 벌써 십여 년.
바느질로 억척스럽게 이어가던 엄마는 좌골신경통과 고질의 해소병이 겹치고 과로에 쓰러지고 말았다. 사십대 한창 시절에 과부된 어머니, 그리고 이제 오십을 바라보는 고비에서 기력을 잃은 어머니.
여고생인 동생과 중학생인 남동생의 생계가 막연하다.
유일한 유산인 집은 팔아서 전세와 월세로 점점 찌들 어가는 형편.
애인이 전방에서 근무하다 지뢰를 밟고 죽었다고 신문에 났다. 애인의 죽음, 어머니의 고질, 생계의 궁핍.
친구의 소개로 비어홀에 취직을 한다. 33번 아가씨. 몇달의 시간이 흐르고 익숙해져갈 무렵. 손님은 줄고 종업원들도 절반이 줄었다.
친구와 함께 옮긴 바 '차이나타운'.
중국 옷차림의 여인들이 풍겨 주는 이국정서, 허황한 네온, 선정 어린 전축의 멜로디, 여인들의 조작적인 교태, 손님들의 술 취한 기성, 비어홀 보다는 확실히 짙은 관능의 물결에 휩싸이는 것만 같았다.
육체란 은혜 자신이 직접 겪어 온 한, 바에서처럼 천한 것은 없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그것처럼 뭇 사나이들에게 눈에 살기를 돋우고 가슴을 이글이글 타게 하는 대상물도 없는 것만 느껴지기도 했다. 언제든지 마음만 내키면 화폐로 바꾸어질 수 있는 몸뚱이들......, 금덩이도 보증수표도 따를 수 없는 환금 가치......, 눈앞에 보이는 것이란 돈 뿐......, 자나 깨나 돈타령, 모든 가치 척도의 기준은 다만 그것 뿐, 그것으로 밤을 살라 먹는 군상들......, 그러나 쓰레기처럼 매양 짓밟혀 버려서 버려지기 일쑤인 육신들......, 인간이라기보다 차라리 고깃덩이, 시궁창 속에서 발악하고 있는 비계덩이들......, 그 탁류에 휩쓸려 은애는 몸부림치며 허덕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일제 말엽 군대 위안부의 정신대로 중국에까지 끌려갔다가 해방 후 상해에서 귀국 선을 타고 돌아왔다는 원로격의 마리아. 자기 말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는 그. 어린 시절엔 교회 찬양대에도 끼었다고 한다. 짙은 화장으로 얼굴을 싸 발랐지만 웃을 땐 옆 퇴색된 역사의 이랑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뜻한 두툴두툴 주름살이 늘어진 처진 눈두덩. 그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아직도 미스 정으로 손님에게 불리우면 비꼬인 웃음을 흘려 넘기다간, 주기가 돌면 곧잘 흘러간 유행가의 구성진 가락을 뽑아 넘긴다. 젊은 축에선 언니로 깎듯이 선배의 대접을 받지만 단골손님들에겐 늑대로 불리기 일쑤인 그......
최신 유행의 무늬가 아롱진주단으로 몸을 감았지만 촌티가 벗겨지지 않은 신설동댁. 주방에서 일보다 수입이 좋은 홀 쪽으로 넘어 붙어, 이름까지도 영자라고 근사하게 붙였건만, 여급들 사이에선 입에 익은 신설동댁 그대로 통화는 뚱뚱보......
대학 영문과엔과 다니다가 미군부대에 취직해 장교의 전용 상대자인 '온리'까지 된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 안나......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결혼하자고 같은 약속을 하고도 본국으로 전속된 후 소식이 없어 세살짜리 튀기 하나와 더불어 고생하다 못해 흘러 들어왔다는 그는, 찢어지는 듯한 목청을 돋우어 제즈를 부를 때면 눈물이 글썽해진다.
다방 레지로 오래 있다가 나이 많은 사장에게 걸려들어 전셋집 한 채 장만하여 신방 차림까지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사장의 발끝이 뜸한테 사이에 다시 깡패 놈팽이에게 덮쳐, 깡그리 손을 털고 도로아미타블로 거리에 나섰다는 혜란이...... 그는 늘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스스로를 저주하고 있다.
어느 대학인지는 몰라도 대학을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나왔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나선 난희. 동료의 아무도 그를 학생이라고 믿지는 않지만, 숙맥 같은 손님들은 그것에 매력을 느끼고 난 희 또한 매일 밤 파티에 손님을 갈아 치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식모살이 하다 마나님이 해산으로 입원한 사이 주인과 관계한 것이 탄로 되어 쫓겨났다는 순이. 지미라고 영화 배우 이름이 좋아서 따왔다지만 무슨 글자를 쓰는지도 모르는 그..... 늘 아무 걱정도 없이 태평스런 얼굴에 품위 없는 우울만 웃음만 싱글벙글하고 있다.
주인 대역을 하는 소위 가오 마담. 본래 고급 장교 부인으로 한때 날렸다는 박마담은, 남편이 군사 교육차 미국으로 파견된 사이에 춤에 놀아나제비 같은 젊은 대학생을 몰고 다니다가 가정파탄을 일으키고야 말았다는 그...... 놔두고 온 자식 애들이 보고 싶어 안달을 하고 있다.
수십 명의 여급들이 우굴 거리는 홀 속에 가지각색의 군상들...... 여기에도 어쩌면 다리 부러진 불구자들만 한데 모인 것만 같다는 느낌을 은애는 금할 길이 없었다.
이 속에서도 주인 한 마담은 색다른 일면을 지니고 있다. 권번출신으로 동기에서부터 시작해 머리를 얹고 일류 요정에서 이름을 날리던 그...... 큰 돈을 잡았다 놓았다, 애틋한 사랑에 잠겼다 떴다, 몇 차례나 가슴에 상처를 받은 고비를 넘겼다. 나중엔 친구끼리 어울려 요릿집을 내었다 집어 치우고, 다시 다방을 경영하다 결국 이 차이나타운을 손에 넣었다. 그 얼굴 모습이나 몸맵시의 어느 구석에서도 오십을 바라보는 인생의 연륜을 찾아볼 길이 없이 그는 젊고 싱싱해 보인다. 남도창, 서도가요, 신민요, 거기에 샹송, 일본 노래까지 못 부르는 것이 없다. 춤에도 고전 현대의 명수다. 들은 풍월로 귀에 익힌 것이지만 미군이 들어오면 몇 마디 영어를 지껄이고, 낯익은 인텔리 손님들에겐 농조로 '메르씨'니 '당케'니 하고 불란서나 독일어 꼬부랑이를 건드려 좌석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데에는 빈틈이 없다. 그는 자기 말대로 술장사를 천하게도 자랑스럽게도 생각하지 않고, 다만 평생 해야 할 천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다.
차이나타운의 특색이란 명칭 그대로 중국어 유니폼을 입는 이국정서에 있다고들 했다. 그곳은 은혜 자신도 첫날밤에 느낀 색다른 이상이 하나이기도 했다. 그 중국 옷을 처음 맞추입었을 땐 은혜도 쑥스럽기 짝이 없었다. 꼭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만 같은 어색한 감을 금치 못했다. 옷깃이 째진 양쪽 허벅 자리로 바람이 새어 들어와 마치 아랫도리를 벗고 앉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거기에만 신경이 쏠려 그는 노상 손을 허벅지께 로만 내려뜨리고 있었다. 그날 그뿐인가 술을 따르느라고 잠깐만 방심하면 그 찰나에 손님의 손은 재빨리 그 사이로 기어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비명을 치며 그 불의의 적을 막으려다가 술병을 엎드려 독특히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그것이 이제는 어지간히 만성이 되었으니 은애는 스스로 변명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식을 만나기 위해 용주골. 처녀의 첫날밤. 그리고 임신 3개월. 휴전선 부근에서 일을 한다는 그를 찾아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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