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 늙은 베르테르의 기쁨. 유안진作

no pain no gain 2024. 8. 30. 11:47

늙은 베르테르의 기쁨. 유안진作

퇴직한 60대 남편이 집에서 하루 한 끼도 안 먹으면 영식님이고, 한 끼만 먹으면 한식씨이고, 두 끼를 먹으면 두식놈, 세끼 다 먹으면 삼식이 새끼라는 구박도 받아가며, 늙은 아내와 함께 사는 그의 일과는 양품가게 차린 며느리가 맡긴 손자를 봐주는 일이다. 대개는 아내가 돌봐주기 때문에 손자 재롱만 즐기다가, 아내가 외출하면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 그네를 밀어주거나, 다치지 않도록 지켜봐주고, 용변 시중을 들어주고, TV 채널을 돌리거나 그림 동화책을 읽어주고, 계란도 삶아주는 등 간식을 먹이고 놀아준다. 그러다가 외출한 아내가 돌아오면 손자 보육의 일과에서 해방된다.

모임이 있는 날은 친구들과 만나 만원씩 내놓고 서로 손자 자랑하고, 모은 돈으로 점심 사 먹고 차도 마시고, 마누라 흉보기라는 미명으로 입만 열면 아내가 시켰다느니, 아내가 해준 보약을 먹는다느니 등의, 팔불출 짓을 일삼고는 기분 좋게 헤어져 귀가하는데, 그런 때마다 손자 없는 친구가 안쓰러워 보이기도 한다. 물론 늙은 아내 구박(?) 애기도 행복 투정이 어서, 홀아비 친구도 처량해 보여, 처복이 상복(上福)이라거나 열 효자 악처 하나만 못하다는 옛말을 되새겨보게 된다나. 더구나 퇴근한 며느리가 손자를 찾으러 오기까지 아내와 함께 손자 시중드는 즐거움이야말로 여러 즐거움 중 최고인 것 같단다. 그래서 손자가 제 집으로 가기 전에 고사리 손을 흔드는 모습을 눈에 담고 싶단다. 손자는 앞 꼭 지보다 뒤 꼭지가 더 곱다는 말대로 종일 시달리다가도 가고 나면 허전한 고요 또는  편안하고, 더구나 불평 많고 잔소리 많은 아내가 한 공간에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든든하고 편안하다고 한다

어느새 창문을 닫고 자게 된다. 절대로 식을 것 같지 않던 폭염 속으로 또 가을이 오고 있었나 보다. 짙푸른 잎새도 누리끼리 블그죽죽 변색될 것이고 새파란 땡감도 붉게 익어갈 테니, 사람이야말해 뭣하랴.  가치도 신념도 소신도 철학도, 연륜과 함께 변하고 마는 것을. 노년의 손자 재롱이나 편안하고 덤덤한 부부애만이 기쁨이 되어버렸다.

창밖의 귀뚜라미 소리도 어느 결에 무릎과 발목의 복사뼈에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절체절명이던 꿈도 야망도 사랑마저도 덧없고 속절없이, 무엇하다 이렇게 늙어 왔나 허망할 때, 그래도 살아 놓은 거라곤 눈앞에 꼬물 여주는 손자자이다. 잔소리와 구박도 안 들리면 집안은 적막강산이 되어 길들여진 노처(老妻)가 있다는 것도, 늙은 베르테르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단다. 65세 이상 인구가 770만 명을 넘었다는 우리나라는, 늙는 게 아니라 익는 것이다. 인생 답게 맛이 들고 깊어지는 것이다. 늙은 베르테르의 기쁨을 누리는 장수도관광 상품이 될 수는 없을까.

상처를 꽃으로 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