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약속. 천성래作.
화자 명재. 대학동아리에서 만났던 후배들. 영훈, 혜경, 은숙. 은숙과는 CC로 뭔가를 약속한 사이.
책을 읽는 마음으로 아내와 살기로 마음먹었다. 하루하루 책장을 넘기듯 단정하고 성실하게 살아보자는 아내와의 약속.
파도는 감미롭고 물속에 빠진 휘영청 황금빛 달은 밝아서 숨쉬기조차 조심스럽던 그날의 설렘이 손끝에 느껴진다. 파도가 부서져 소금밭 같던 그 위에 아내의 부끄러운 입술이 머뭇거린다.
모든것들이 아름답게 달빛 속으로 녹아들던 밤에 밤에 명재는 아내와 하나가 되었다.
아내의 살결은 보드랍고 은밀했다. 그 속을 깨물면 박하사탕같은 단내가 흘러나올 것만 같아 차마 떨리는 손을 건사하지 못하다가 겨우 가슴께로 들이민 손의 떨림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감동적 순간이다. 생애에 이런 감동의 순간을 추억처럼 간직하며 산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가슴벅찬 일이다.
아내의 영혼은 맑고 깊다.
결혼해서 적어도 3~4년 정도는 책을 읽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런데 세상은 참 이해할 수가 없다. 자신과 무관하게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어떤 까닭모를 운명을 맞게된다.
대학졸업 이후, 처음 회사에서 바닷가 야유회 갔을 때 만났던 아내 상숙. 아내는 절실하게 사랑하던 애인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자살을 결심하고 찾아온 바닷가에서 명재를 만나 급속한 인연이 만들어진다.
시기심 많은 사촌동생 상희. 언니의 애인을 뺏고,미인대회출신의 장점을 살려 영훈과의 결혼.
영훈은 CC였던 혜경과의 만남을 이어간다.
잊고자 했던 은숙은 명재와의 깊은 사랑이야기를 실명으로 소설화 해서 대 히트를 하고 인기작가의 반열에 올라선다.
출판사 편집장 일을 하는 명재에게는 은숙의 출간이 중요한 딜레마.
"당신 은숙이란 여자하고 잠을 잤나요?"
그는 아내의 다그치 듯한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은숙 과의 처음 짜릿했던 순간들이 디지털 필름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은숙의 화려한 몸뚱이, 뱀처럼 그에 몸을 휘감고 들어오던 은숙의 나신, 참치 못해 내뿜던 신음소리의 교합, 온몸의 찌꺼기가 한꺼번에 분출되던 순간의 기억, 은숙의 몸속에서 새로운 신화 같은 신비로운 세상을 꿈꾸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내가 이런 물음을 물어 오리라고는 설마하니 상상도 못했다. 그는 아내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 것인가 망설여졌다. 사실대로 말해 버려? 아니, 죽어도 아니라고 딱 잡아떼? 순간 이런 생각들이 수없이 스쳐 지나갔다. 세상의 모든 아내는 그런다고 했다. 남편이 설렁 다른 여자하고 바람을 피웠더라도 아내 앞에서 부인(否認)하라고 말이다. 아내 앞에서 사실대로 말을 하면 아내가 남편을 곁에 머물 수 있는 기회를 박탈 하는 거라고 했다. 아내는 남편이 바람피운 사실을 안다더라도 남편이 부인하면 그곁에 머물 체면을 최소한 갖추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바람을 피웠다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남편의 옆에 자존심을 지켜줄 아내는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요. 잠을 자지 않았소. 당신 말고 다른 여자의 몸을 만져본 적이 없어요. 이건 사실에요. 믿어줘요. 여보."
그는 순간 아내를 속였다. 속이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 아내를 여전히 사랑하고 아내와의 하루하루 세상을 열어 가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의 말에 아내는 기막히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 당신 정말 나쁘군요. 아내를 두 번 속인 셈인가요?"
" 당신은 언제나 그 여자를 그리워했죠. 해지는 저녁놀 창가에서 책을 읽는 당신의 모습은 그리움 그 자체였죠. 저 남잔 대체 누굴 그리워할까? 이게 당신과 사는 이 여자의 화두였어요. 나를 껴안으면서도 당신을 눈 속에는 다른 여자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찼어요. 그뿐인가요. 당신과 섹스할 때, 그건 더욱 심하죠. 당신 기억나요. 흐트러지게 섹스를 치르던 언젠가 한번 그랬죠. 은숙아,날 세상에 은숙이라고 했어요. 설마 당신이 그걸 부인하지는 않겠죠. 나는 마음속으로 당신이 입속에 매달려 밖에 나오지 못하고 덜렁거리고 있는 소리를 모두 들을 수가 있단 말이에요. 그래 그 여자하고 실제로 자니 어떻던가요?"
" 사흘에 한번은 나를 안았죠. 그게 모두 은숙이란 여자가 그리워서 했던 짓이던가요? 정말 그랬어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당신의 눈 속의 다른 여자가 있었죠. 그러면서도 설마 아니겠지, 했던 거예요. 세상에 시를 쓰고 책을 만드는 사람이, 첫날밤에 책을 만들고 책을 읽는 마음으로 살자고 철통같이 약속을 했던 사람이, 그럴 리가 없지, 하고 자위했죠. 은숙이란 여자의 존재를 알고 서 그게 구체화되었어요. 세상에 나를 그런 식으로 배신하다니,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고요. 아주 나쁜 사람......"
아내 투정은 사실이었다. 그는 아내의 얼굴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했다. 은숙의 이미지였을 것이다. 특히 섹스를 하는 은밀한 순간에 아내의 이미지는 통째로 은숙의 이미지가 되어 나타나기도 했던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출판사에 사표를 내고 은숙에게 전화했다. 오라고 한다. 솔직히 이제 은숙을 떠날 마음의 준비까지 되어 있었다. 아주 짧은 기간 마치 목숨을 내걸고 한 순간 짝짓기에 도전하는 숫사마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숙은 곱게 단장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이 깊게 파인 홈 스웨터에 짙은 화장이 눈에 띄었다. 여전히 맑고 고운 눈빛, 그를 보자 흰빛 도자기 같은 갸름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선배, 어서 와요. 기분 좋아 보이는데요?"
그럴 것이 었다. 그는 배내미 마을의 청동 빛 맑은 하늘과 거문고 소리 같던 청아한 바람 소리, 나무들 나란나란 흐르던 개울에 속삭임, 두엄자리 밑에 싹터 나오던 잔디풀처럼 투박하며 질긴 주민들을 생각하면 절로 눈, 코, 입, 귀, 피부 모든 것들이 생명이 울림을 지니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 우울의 껍질들도 뚜껑을 열고 나와 묵은 때를 버리고 새 기쁨과 희망에 도취 될 것이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 내 말은 나에 대한 감정, 네가 오랜 시간 날 기다린 만큼 지금도 그 열정을 지니고 있느냐고 묻고 있다."
" 감정의 굴곡이 있는 건 당연한 거예요. 선배도 나에 대한 감정을 굴곡으로 나를 쉽게 버리고 다른 여자를 택할 수 있었던 거 아니에요? 내가 영원히 선배를 지배할 수 없는 것처럼 선배 역시 날 영원히 지배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날, 함부로 막 생각하지 말아요. 여자들은 작은 것에 상처가 큰 법이에요. 그리고 선배 난, 말예요. 새로운 도전을 좋아해요. 해밍웨이가 작품을 시작할 때 새로운 여성을 원했던 것처럼 저도 새로움을 원해요. 그게 내 방식의 자유죠"
"나를 받아들인 게 아내를 배신했다 이거 군요. 선배 그 정도로 배신이란 말을 사용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선배가 나를 어떻게 했게요? 옛날 애인 만나, 예, 선배 애인 맞죠. 오랜만에 해포 한번 풀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행위가 누굴 구속해선 안 된다고 봐요. 나도 선배를 구속할 수 없고 선배도 날 구속할 수 없어요. 봄날은 아지랑이 이처럼 아른거리다 떠나가 없어져버린 신기루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무엇에 얽매여선 안 돼요. 세상에 널린 자유, 네 그게 바로 권리죠. 그걸 누리고 빼앗겼다면 되찾아야죠."
누가 먼저 요구했던지 영훈과 처제는 이혼을 한다. 쇼호스트인 혜경은 영훈과 거리를두고.
회사의 정리와 상숙과 이혼. 그리고 서울을 정리하고 배네미로 떠난 명재. 미뤄두었던 시와 소설을 전념하기로 한다.
영훈은 회사를 그만두고 쫓기는 심정적으로 방황하다 자살을 한다.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만난 사람들.
휴대폰이 울린다. 뜻밖에 아내였다. 아내의 목소리가 달빛보다 곱고 감미롭게 들려왔다.
"아무 말씀 말아요. 나 지금 시를 읽고 있어요. 제부 장례식장에서 당신 뒷모습 보았어요. 당신이 상희하고 승용차 쪽으로 걸어가던 모습, 은숙이라는 여류작가 하고 어색하게 포옹하던 모습, 혜경이란 여자가 당신에게 오래오래 손을 흔들어주던 모습, 다 지켜보았어요. 당신 그렇게 가시면서, 세상에 어쩌면 나만 외면 하고 가셨나요? 얼마나 서운했다고요. 내 말 들어요. 당신?"
아내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그도 거의 목이 메어왔다.
"여보 나 지금 당신이 그 전날 써둔 시를 읽어요. 당신과 살았던 몇 년이 정말 행복했다는 얘기를 해 드리고 싶어 전화했어요."
아내는 축축히 젖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가슴에 맺힌 모든 서운함들이 일시에 풀려버린 느낌이 들었다.
꽃은 피고 지고
그래도 세상은 아름답구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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