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복수초.

no pain no gain 2024. 1. 16. 16:06

얼음새꽃. 복수초. 목성균作.

잔설이 미처 다 녹지도 않은 언 땅을 떠밀고 청초하기 이를 데 없는 노란 꽃 두 송이가 피어 있었다. 무슨 꽃 일까?
누구는 사랑하던 빨치산 남녀의 고혼이라 했고, 누구는 전사한 880부대 소년 병의 넋이라고 했다. 그리 보니 그럴듯 했다.
그런데 문득 나는 미치광이 박 중사와 그의 아내가 생각났다. 이화령을 수비하던 880부대는 정전 다음해에 해체되었는데 이북이 고향인 외로운 젊은 군인 한 사람이 산읍의 미친 여자에게 마음을 뺏기고 주둔지에 홀로 떨어졌다. 그를 가르켜 사람들이 미치광이 박 중사라고 불렀다.

내가 그럴 처음 본 것은 눈이 오고 갠 겨울날 저녁이었다. 저녁 바람에 문풍지가 비파 소리를 내는데 밖에서 "영감 마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젊은 남녀가 손을 잡고 남자는 발에 끌리는 군용 오버를 입었는데 새끼로 오버 자락을 동여 맸다.  체신이 작은 사람이 오버 속에 놀란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철 적은 한 노랑반회장 겹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앳된 여자가 보채는 어린애처럼 딸려 있었다. 옷은 땟국이 흐를 지경이었고, 역시 땟국에 전 명 자치로 머리에서 귓때기를 푹 싸맸다. 얼굴에 백회를 뒤집어 쓴 것처럼 분을 바르고, 입술에는 새빨갛게 연지를 칠했다. 눈동자는 풀려있고 침을 흘리듯 웃음을 질질 흘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톰한 입술과  오똑한 코가 참 예뻤다. 남자의 눈은 맑고 초점이 잡혀 있었다. 전혀 미친 기색이 아니었다. 그들은 미치광이 박중서와 그의 아내였다.

장작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박중사.

"공부 열심히 하게. 이런 시 아시나? '소년이로학 난성(小年易老 學難成) 일촌광음불가경 (一寸光陰不可輕) 미각지당춘초몽 (未覺池塘春草夢) 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 하느니라' 했어.  무슨 소리인 고 하니 소년이 늙기는 쉽고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단 말이야, 그러니 반짝하는 순간이라도 헛되이 보내지 마라. 인생이란  연못가의 봄풀이 미처 봄 꿈이 깨기도 전에 계단 앞 오동나무 이파리가 가을 소리 내는 것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거야."
박 중사는 두 팔로 감싸는 아내의 어깨를 장단 치듯 토닥거리며 내게 주자(朱子)의 시를 읊어 주었다.

여름 방학을 해서 집에 와보니 박 중사는 연풍 장터에 없었다. 그해 봄 그에 아내가 해산을 하다가 난산으로 산모와 아기가 다 죽고 박 중사가 정말로 미치광이처럼 장고샅으로, 들녘으로 헤매다니더니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산읍 사람들은 미친 그의 아내가 가엾은 박 중사를 편한 곳으로 데려갔다고들 했다.
나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몰라서 가끔 가끔 안타까워했었다. 어디서 미친척 거짓말로 세상을 희롱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사람들 말마따나 미친 그의 아내를 따라서 사바를 건너서 피안으로 갔을까.....,

꽃이 핀 자리에는 봄이 오는 남한강과 소백산맥의 연봉들 변함없이 아름다운 강토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눈물겨운 자리였다.  박 중사가 빨치산을 추적하다 앉아서 시대의 아픔을 생각하며 눈물짓던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 꽃은 야생화도감에서 찾아보니까 얼음새꽃( 복수초) 이였다.

이화령 고개와 조령산.
나도 등산을 하면서 가끔씩은 구석지고 얼음과 눈속에 노랗게 피어있는 복수초를 보고는 했다. 인동초라고도 부른다 던 꽃.

작가는  1938년생으로 일제강점기와 한국동란을 격고 산업화의 시기를 중심으로 헤쳐나온 인물. 마치 인동초같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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