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山)에 사는 맛. 김향안作.
우리가 성북산협(城北山峽)에 자리 잡았을 때는, 굵은 별장과 띄엄 띄엄 몇몇 초가집 있었을 뿐으로 우리는 서울에서 살고 있되 완전히 산에살고 있는것 같았다.
맑은 공기와 수묵의 향기와 흐르는 물소리와 기저귀는 새의 노래 소리는 우리의 젊음의 배가되는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혜화동 입구에서 보성중학 고개를 넘어 산협에 이르는 2, 30분의 거리를, 또는 삼선교에서 골짜기까지 올라오는 3, 40분의 거리를 항용 날마다 도보로 내왕 하고도 피로한 줄을 몰랐다.
집에 있는 날은 산에서 굵은 돌을 주워오고, 앞개울에서 잔돌을 주워 날라 축대를 쌓아 올리고, 밭을 갈아 채소를 심고 정원을 만들어 화초를 가꾸기에 골몰했다.
집 앞에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서 있었으며 뒤안에는 아름드리 밤나무와 대추나무, 감나무, 자두, 복숭아 그리고 앵두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이른 봄 제일 먼저 노란 꽃이 피는 것은 산수유이고 그 다음이 개나리요, 이어 진달래가 피면 그냥 뒷산이 불그레 취해버리고 앞 개울가에 늘어진 수양버들이 연둣빛으로 물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살구꽃, 복숭아꽃까지 피어 버릴 때, 온 골짜기가 꽃 천지가 되고 하늘마저 가려져 버린다. 시내에서 국민학교가 소풍을 오고 때로는 사이 좋은 노老 부부가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서 우리 집 후원에서 놀고 가는 것을 보는 때도 있었다.
가다가 온종일 시내의 먼지와 소음에 시달렸다가도 우리 집에 이르는 골짜기만 들어서면 그냥 피로가 씻은듯이 풀어졌다. 한여름에는 모시옷을 입고 나갔다가 해질 무렵 골짝엘 들어오면 옷이 명주 처럼 풀이 죽어 버리도록 계곡은 습기가 차기도 했다. 이럴 때 골짜기에는 물 소리밖에 안 들렸다. 이 맛에 우리는 산골을 못 떠나고 산에 묻혀 살다가 난리를 겪고 아까운 계곡을 버리고 부산 살이 수년을 살았다.
20년도 더 된 그 시절 어느 오월에 기억이 떠오른다.
서울 장안에서 당분이라고 는 찾아볼 길 없었던 시절인데 산장 호텔에는 달기 단 밤만두과자, 잣배기 가 얼마든지 있었다.
신록은 우거졌어도 산장의 홀은 냉랭해서 기둥만큼씩한 통나무토막을 페치카에 피우고 커피를 끓여주며 홍차도 끓여주었다. 사람들은 전쟁에 몰려 도시에 집결해 있었기에 금강산장의 호텔은 대절한 것처럼 우리 밖에 없었다.
우리는 날이 밝으면 산에 올랐다. 신선한 공기와 수묵 향기만이 가득한 산협에는 흐르는 물소리와 산새의 노랫소리만이 우리들의 대화에 호응했다. 우리는 식물처럼 싱싱했었다. 그때 우리는 해마다 5월이 되면 금강산장을 다시 찾자고 했던 것이나 그의 이후 다시 한 번을 못 가본 채 산장에 이르는 길은 굳게 막혀지고 말았다.
몇 해 만엔가 오월을 그리고 산장을 그리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같다.
구라파 있을 때 피레네 산록을 못 가본 것은 유감이나 파리 근교의 산을 더러 찾아보았을 때 우리나라 같은 첩첩산중에 맛은 도저히 안 났었다.
숲들은 깊숙이 우거져 있으나, 첩첩한 산에 맛과 숲에 맛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서울 주변에 산들은 참 아름답다고 아니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얼마나 배부른 자연의 보배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1961.
1916~2004. 1944년 우리나라 최초의 추상화가의 길을 개척한 고독한 예술가 김환기와의 결혼. 이미 애가 셋인 홀아비는 신안 안좌에서 살다가 김향안을 만나 서울생활을 하다 전쟁으로 부산 생활을 한다.
서울대와 서강대에서 미술교수를 하다가 아내의 예지로 파리로 유학.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술창작에 전념하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으로 살아서는 작품이 안팔려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사후 경매에서 130억이 넘는 작품으로 평가되는데, 10위 안에 9개의 작품이 김환기의 그림이다.
그런 사람과 부부의 연을 맺고 전처의 자식을 키우면서 틈틈이 써내려간 수필. 이대와 소르본과 애콜 드 루브루에서 수학했다. 김환기와 사별후에 30년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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