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감은 눈 뜬 눈. 천운영 作

no pain no gain 2023. 10. 11. 17:26

감은 눈 뜬 눈. 천운영 소설집에서.

"나는 여자들을 좋아한다. 여자의 기질이 아니라 여자의 몸을 사랑한다. 야들야들한 젖가슴과 쫀득쫀득한 입술과 매끄러운 허벅지에 열광한다. 고추냉이 냄새가 나는 거웃의 알큰한 맛과, 날 옥수수 냄새가 나는 발가락의 비린 맛을 즐긴다. 찝찌레한 땀 냄새 조차 상큼한 해초 냄새를 닮은 여자들. 여자들의 기다란 손톱과 가느다란 목과 하늘하늘한 머리카락에 가슴이 설레고,  여자들의 퉁퉁한 불두덩과 봉긋한 아랫배와 동그란 무릎팍에 피가 뜨거워진다. 위태로운 것은 위태로 와서 좋고, 둥근 것은 둥글어서 좋다. 여자들의 몸속엔 발이 푹푹 빠지는 개흙이 있는가 하면, 은빛으로 빛나는 모래사장도 있다. 내가 만난 여자들 중에는 손가락이 섬세한 조각가도 있었고, 아름답지만 성마르고 냉정한 산부인과 의사도 있었다. 그녀들은 단 한 번의 눈길만으로도 다리를 벌리고 나를 받아들였다. 내 말에 순종하는 그녀들이 너무나 시시해서 하품이 날 지경이었다. 내가 지나가고 나면 나와 닮은 녀석들이 시시때때로 그녀들을 겁탈하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아무에게나 몸을 내주는 늙은 창녀나 다름없었다."

"난 너를 선택했다. 너를 택했다고 해서 늘 너와 함께였던 것은 아니다. 나는 종종 밤 사냥을 나가는 박쥐처럼 네 몸을 빠져나가곤 했다.
나는 한갓 짐승일 뿐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매번 너에게로 돌아왔다. 너의 몸은 변함없이 부드러웠고, 너는 그 보드라운 몸으로 오직 나만을 받아들였다. 나는 자궁 속 태아 처럼 몸을 웅크린 채 네 심장에 귀를 기울였고,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안식을 얻었다. 너는 그 어떤 짐승도 침범할 수 없는 성녀였고, 나는 창녀와 성녀를 오가며 구원을 얻는 이중첩자였다."

소설은 소설이다.
픽션의 세계에 그림을 그리고 건물을 세우고 사람들이 춤추는 연기를 무형의 그림자로 완성하는게 소설이다.
머리속에 많은 줄기를 가진 생각들을 앞뒤와 순서를 정해가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창작의 세계를 무지무지하게 존경한다.
그렇다고 픽션과 논픽션의 세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것이다.
고로 나는 바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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