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문장가 김려. 부령 귀양시절.
오늘 꿈길에 내 살던 집에 갔지.
둥글은 보름달 두둥실 떠올라,
지팡이 짚고 이리저리 뜰을 거닐다 .
형유와 함께 도랑을 건너는데,
물이 깊어 고기들 유유히 잘 놀더군.
꿈 깨어 하늘 보니 달빛만 쓸쓸.
우물가에 빨간 앵두가 수천송이 열렸다.
긴 가지 짧은 가지 열매 맺어 늘어졌네.
연희가 손수 따서 광주리에 담고 보니
동글동글 하나같이 수정 빛으로 영롱하다.
한 알 떼어 내어 입에 넣고 연희가 이르는 말
"내 입술이 붉은 가요 앵두가 붉은 가요 "
연못에 붉게 핀 연꽃 천만 송이
연희 생각에 사랑스럽구나.
마음도 같고 생각도 같고 사랑 또한 같았으니
한 줄기에 나란히 난 연꽃을 어찌 부러워했으랴. 평생 살면 즐거운 이가 원망스러운 이가 되고
좋은 인연이 나쁜 인연이 되는 건지.
하늘 끝과 땅 끝이 산하에 막혀서
죽도록 부질 없이 이별 가만 불러 대네
전생의 죄과로 이생에서 이렇게 고생하는지
연희야, 연희야. 너를 어찌 하랴.
북풍이 휘몰아쳐 골짜기에 얼음이 가득한데
자리만 한 눈꽃송이에 차가운 집이 파묻혔네.
빈 침상에 홀로 누워 있자니 수심만 많은데
찢어진 창 문풍지엔 바람이 펄럭펄럭 때리네.
문득 들리네, 또각또각 돌길을 걸어오는 소리.
연희가 눈길을 밟고 와 사립 문을 두드리네.
새까만 호리병을 왼손에 들고서
화로 앞으로 달려가 손수 술을 데우네.
거나해져 긴 노래 부르니 귓볼이 더욱 훈훈해
세상에 그 누가 그대만 하랴.
긴 여름 장마에 개울이 넘쳐
닷새나 연희 얼굴을 보지 못했네.
오늘 밤 비 개고 모래톱에 달이 뜨니
물가에 푸른 버들 비단처럼 살랑이네.
지팡이 짚고 신 신고 개울가로 나가는 건
연희에게 가려는 뜻 간절해서지.
그때 보았지, 모레 기슭 우거진 숲에
나뭇가지 살짝 흔들리며 그림자 스치는 것.
작은 우산에 치마 끌며 술병을 들고서
연희는 벌써 다리 건너 이쪽으로 오고 있네.
기나긴 여름철에 질금질금 비 오는데
연희는 베틀 올라 베를 짜네.
나흘에 백 자 짜던 그 솜씨로 엿 셋 짜니
곱기는 비단 같아 아른아른 살 비치네 .
두필 로는 단령에다 도포까지 만들었고
한 필로는 배자 짓고 겹저고리 말고서
한 필하고 열자로 홑중의 창을 짓고
등거리와 행전까지 새롭게 마련했네.
이 늙은이 몸뚱이에 씌워진 한 벌 옷이
모두가 연희 손수 지어준 것이었네.
저번 날 연희와 나, 남몰래 약속했지.
도롱이와 삿갓 사 가지고 둘이 다 농군 되어
나는야 가래 들고 연이는 호미 잡고
백 년 동안 함께 살며 농사 재미 누리 자고.
사람들 꿍꿍이속 자칫하면 망상이라
그때 약속 빈말 되고 지난 추억 더듬을 뿐
어이 하면 훨훨날아 좋은 고장 찾아가서
마음 맞는 그 사람과 옛 약속 지켜볼꼬.
연희가 타이르던 말, 글짓기 조심하세요.
세상이 어지러워 화 당하기 쉬우리다.
긴긴 밤 잠 안자고 찬 이불 끼고 앉아
고금의 일 이야기하며 함께 눈물 흘렸지.
그날 마침 눈이 멎고 바람이 세찼어라.
푸른 하늘 물빛 같고 밝은 달 교교한데
뜰 앞에서 들리는 마른 잎 지는 소리에
장차 이별할 생각 쓸쓸히도 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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