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천황산

no pain no gain 2012. 3. 19. 17:16

내가 가는 길이 안개밭으로 이어진 천황산

 

이름 모를 산새가 운다. 청청하기만 한 공기의 내음이 깊은 산사에 도착했음을 안다. 검은 형체의 등걸 같은 절집이 캄캄하기만 한 고요 속에 새벽잠에 빠져있다. 가끔 강한 불빛으로 헤드랜턴이 늘어선 고목을 흩고 지나간다.

 

우리는 이 고요를 깨지 않고 산행을 시작하기로 한다. 졸졸거리는 물소리가 봄이 왔음을 귓전으로 스치는 바람소리로 전한다. 숲이 썩어가는 낙엽냄새가 기분 좋게 퍼져있다. 급하지 않은 발걸음으로 우측 산세를 돌아나가 얼마쯤 걸었을까? 줄지어 이어지는 랜턴 불빛 너머로 절집의 형체가 마치 파문으로 덮인 진공의 더께가 앉은 듯하다. 무념무상. 저 속에 숨쉬는 자들의 평화와 안녕이 있을 지인데, 예전에 절을 창건 할 때 처음 지은 자리에서 서기가 내려앉은 자리로 옮겨온 곳이 지금의 자리라 하던데, 그 사람들의 눈에는 과연 천년의 세월을 내다보는 혜안이라도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 많은 세월을 지나오면서 소실되고 다시 짓고 하는 고난의 역사도 보인다는 걸까?

 

희붐하게 밝아오면서 하나둘씩 꺼져가는 랜턴. 그리고 맞은편 산 중턱을 흘러 내리는 지난 겨울의 흔적. 흰 눈이 마치 폭포가 흘러내리듯 길게 여운을 남기고 골짜기를 그려낸다. 마침 세차게 떨어지는 물소리에 눈을 들어 전망대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해가 뜨기 전. 남색에다 물을 탄듯한 푸르스름한 청색의 세상이 펼쳐지는 비경. 다시 이곳을 방문한다 해도 이런 색상의 느낌은 다시 보기 어려우리.

 

다시 재 충전의 쉼을 뒤로하고 거대한 절벽의 우측을 끼고 돌아가다 보니 마치 평지의 둘레 길을 걷는 듯한 포근한 흙길로 이어진다. 모두들 칭찬 일색이다.

그리고 즐거운 웃음 소리는 여기서 끝.

 

삼거리에서 좌로 돌아 고사리분교 터로 시작된 사자평원은 촉촉했던 지금까지의 길과는 달리 질퍽거리면서 신발에 엉키기 시작해서 한 무더기씩 뭉텅 달라붙어 함께 살자고 아우성이다.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듯이 걷는 속도에 맞춰서 따라온 안개는 서서히 사자평을 감싸더니 온 산을 휘감고 바람마저 잠재운다. 꼭 가야 할 길만큼만 보이는 안개. 우린 지금 어디를 헤매고 있는 걸까?

 

간밤에 내린비로 정갈하게 씻긴 낙엽

발길따라 운무가득 감싸안은 사자평

못이룬 쳔년의꿈을 바람결은 알려나

 

가을이면 은빛 물결이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 사자평원. 125만평이라 하니 먼 옛날 이런 곳을 발견한 군주라면 새로운 나라라도 하나 세웠을 꿈을 간직할 만한 땅이다.

 

풍화작용 탓이었을까 잘게 쪼개 놓은 듯 부서진 편린처럼 얇고 넓은 돌들이 너덜길처럼 널려있고, 평지처럼 보이는 길도 침묵을 박아놓은 걸 보니 평소에도 얼마나 질컥거리는 진창인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길게 이어지던 사다리 경사로. 목적이 무수하게 여러 갈래 길을 하나로 모아 산을 보호 한다는 명목이었지만, 또 다른 한 켠에서는 풍력발전기와 천황산까지 이어지는 케이블카 설치공사로 갈등을 빚는다 한다.

산을 사랑한다면 산은 그냥 산답게 그냥 두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재악산(1108M) 정상을 넘어가는 길에는 바위 사이로 녹지 않은 얼음이며 눈밭이 있어 자칫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나가다 보니 바짓가랑이는 온통 흙밭이가 되어있고 길이라고 울타리 친 곳은 오히려 진창이라 더러는 발이 빠지지 않도록 살살 피해 다닌다. 경사진 곳을 열심히 오르다 보니 드디어 정상 천황산(1189M)에 도착 했으나 선두는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땀이 식어오면서 온몸이 떨려 어디 바람이라도 피할 곳을 찾아 내려서다 보니 3명의 단촐한 하산길이 됐다.

그러나 이제부터 비극의 시작이었으니 길을 따라 짚는 곳마다 발목까지 빠지는 진창에 더러는 탐방로로 만들면서 설치해둔 말목까지 빠져서 함께 미끄러지면서 휘청거린다. 아뿔싸!

조심 또 조심하면서 속도를 줄이고 주위의 잔 나무 숲을 내려와 소나무와 굴피나무 숲이 보일 즈음해서 조금 더 내려가니 이 산 바위는 모두 깨져서 흘러 내려온 듯한 돌 무더기 너덜 길을 지나 나무로 만든 계단참을 내려서니 반가운 물소리가 들린다.

 

뜨거워진 발바닥을 식힐 겸해서 폭포아래 너른 바위에 배낭을 풀고 허기가 느껴져 시간을 보니, 3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7시간여가 지났다. 이 참에 간식을 먹으면서 선두 일행을 기다리기로 하고 40여분을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다. 얼음골이라 하더니 정말 얼음보다 더 차갑게 느껴지는 물. 돌을 베고 누워서 보니 간간이 떨어지는 빗방울. 다시 배낭을 메고 하산을 한다.

 

얼마나 성능이 좋은 앰프를 설치했는지 천황사에서 외는 독경소리가 깊은 산 속에 까지 들린다. 반야바라 바라밀다……사바하. 천황사에 도착 절집 구경을 한다. 여기에는 보물이 그렇게 많다는데,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보물 안내문이라도 하나 설치 해두면 찾아보는 길이 쉽지 않을까?

 

절집 구경을 마치고 미리 정한 식당으로 가는 길에 산책길로 들어서 잘 관리된듯한 소나무 숲이 나온다. 끝날 참에 돌로 지은 임시 막사 같은 곳에는 스님들이 열반에 든 다음 치르는 다비장을 하는 장소라 안내가 붙어있다. ! 스님들은 이곳에서 인간세상에 사리를 남기고 한 줌의 재가 되는구나. 나무아미타불.

 

식당에 들러 산채비빔밥에 더덕막걸리 한 사발로 하루의 추억을 접는다.

 

2012.03.19.

 

'등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길도  (0) 2013.06.11
[스크랩] 장수. 장안산  (0) 2012.10.31
남덕유산  (0) 2011.09.22
[스크랩] 지리산 다녀온 이야기  (0) 2010.11.17
팔공산 동봉에 서면   (0) 2009.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