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신선한 충격 자연을 접하다.
간간이 흩날리는 빗방울을 헤치면서 장보고호는 땅끝마을 선착장을 떠난다.
이물에 길고 긴 포말의 흔적을 남기면서 잔잔한 바다를 유영하듯 매끄러운 몸놀림이다. 노화도에 도착 버스를 타고 섬과 섬이 연결된 연도교를 넘어 병자호란에 임금의 항복이 못마땅한 윤선도는 제주도로 은거하러 가기 위해 떠난 길에 풍랑으로 잠시 머문 보길도에 반한다.
정치로 바꾸고 싶은 세상을 이루지 못하고 정적의 벽에 부딪힌 세파는 남도 특유의 시와 풍류로 새로운 이상향의 나라. 나만의 극락을 만들어 낸다. 물소리 바람소리, 소나무 잎새가 바위 위에 흔들리는 곳에 마음을 뺏겨 떠오른 달이 죽림을 흔들어 대는 뻐꾸기 노래를 오우가로 남기고, 학창시절 숱하게 외우던 윤선도의 문학세계는 이런 자연을 보지 못한 체 껍데기만 보고 익힌 공부다 보니, 단어는 알되 그 숨은 뜻은 모르는 반 쪽짜리 학식으로 성장하는 모자란 부분을 여기 보길도 세연정, 낙서재에서 연이어 불러대던 어부사시사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를 알고 간다는 것이 큰 수확이라 하겠다. 나도 이런 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 유유자적 노래와 풍류를 즐기면 윤선도 선생의 못다 쓴 후편의 기록을 남길 수 있을까?
들머리를 찾느라 언덕진 밭두렁을 줄지어 따라가다가 보니 한 켠에서는 마늘을 캐고 밭을 갈아 다음을 대비하는가 하면 양파는 실한 알뿌리를 드러내 놓고 대는 모두 쓰러진 상태로 바쁜 농부의 손길을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물이 노래하는 집이라는 곡수당(曲水堂)을 기점으로 산행 초입에 들어 선다.
어두 침침한 길. 낙엽은 온통 돌 이끼가 창연한 잔 돌들을 덮고, 나무들은 서로 엉켜 하늘을 가려 빽빽하게 들어선 자연림의 향기가 넘쳐나는 기운이 상록림 특유의 숲이 썩어가면서 나는 냄새는, 300여년 전 고산 선생이 의관을 정제하고 갓 끝을 올려가면서 산책으로 사색을 즐겼을 만한 힐링의 길이다. 아마도 빗겨 든 햇살 사이로 들리던 새 울음 소리가 가야금 어느 현을 건드리는 것으로 일맥 상통하였을 법한 영감이 충만 하였으리라!
능선에 도착. 잠시 쉬었다가 목을 축이고 산에 난 사거리에서 주인원이 지금 한창 걸어오고 있을 완만하게 경사진 최고봉인 격자봉을 넘어서, 어디쯤일까? 수리봉을 건너왔을까 하는 짐작으로 광대봉 길을 따라 천천히 느린 산행을 한다.
가는 길엔 온통 천연의 전시장으로 사람들의 행적이 적어 그나마 이런 자연이 존재 할 수 있었겠구나 하는 위안을 삼는다.
바위며 묵은 나무 등걸은 그 귀한 콩짜개난의 뒤 덮인 세상. 더러 무리 지어 있는 바위채송화와 오래 전에 누군가가 망태기를 가져왔다가 숲 속의 풍경에 넋을 잃고 버려두고 간 듯한 모습으로 뿌리로 이어진 바위고사리의 뒤 덮인 정경이 아이비 줄기처럼 한데 엉키고 뒤섞인 숲의 군락들이 마치 오래된 정원을 지나가는 이방인의 발길을 오히려 신기한 눈망울로 구경하는 듯한 묘한 착각에 빠진다.
남쪽나라 해풍의 거센 바닷바람을 맛보며 자라는 바위손이 새로이 피어나는 푸른빛에 연한 보랏빛 뒤섞임이 마치 갓 태어난 어린 아이의 내민 조막손 같은 감흥에 여기저기 둘러봐도 온통 발 딛기가 조심스러운 천혜의 자연 앞에 숙연할 따름입니다.
어우러지는 삶. 아이들의 주먹만한 달팽이가 행여 발에 밟힐세라 살살 살피면서 지나가다가 어느 언저리에 서니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탁 트인 시원한 전망대. 여기가 광대봉이구나. 표지석 하나 없는 상태. 그냥 지나가는 길손을 향한 이정표만 있구나.
이제는 하산길로 접어들어 동백림의 상록수 군무를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춤을 추는 모습에서 마치 서편제의 해넘이 춤사위가 이토록 아름다운 정경에서 비롯되었을까 하는 상상도 해 봅니다.
어디선가 불어주던 서늘한 바람은 바삐 사는 현대인이 한번쯤 뒤 돌아보는 여유를 가지라는 귀띔인 듯 합니다.
아름드리 해송이 줄지어 있던 마지막 산행의 날머리에서 느끼던 아쉬움의 견해는 보길도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동백꽃들이 휘둘어 피었을 이른 봄. 비단 같은 그 길을.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이 지나가는 길마다 온통 카핏처럼 깔려있을 때 다시 한번 오라는 무언의 약속처럼 들립니다.
2013.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