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오버더 실크로드(Over the silkroad) 함영덕 作/늘푸른소나무 刊/07

no pain no gain 2009. 8. 11. 16:50

오버더 실크로드(Over the silkroad) 함영덕 /늘푸른소나무 /2007.

 

중국 여행은 세월이 흘러도 옛 역사의 흔적을 찾아가는 기행이다. 지명 하나를 들춰낼 때마다 춘추전국시대, 초한지, 삼국지와 불경을 구하러 서역을 찾아 떠나는 서유기가 고스란히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모습들이 아는 것만큼 보인다.

 

*오월동주의 전설이 살아있는 곳 소주(蘇州)

 

중학교 다니던 시절 어떤 책을 읽다가 ‘손자병법’에 대한 이야기에 호기심이 발동해 아버지께 부탁 드려서 처음 산 책이 ‘손오병법’이라는 책이었다. 손자는 알겠는데, 오자는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에 몇 번을 탐독해서 오자서가 손자보다도 훨씬 뛰어난 병법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옛날이여!.

 

초나라 평왕의 태자 건의 태부였던 오자서의 아버지 오서, 형 오상은 간교한 신하 무기(無忌)의 모함으로 인해 평왕에게 죽임을 당한다. 위협을 느낀 오자서는 오나라로 망명. 왕자였던 광은 오자서를 알아보고 빈객으로 심복을 삼았다가 후에 왕이 되자 오왕 합려는 오자서를 모사로 손무를 장군으로 삼아 국력을 키워 기원전 506년 채() () 두 나라를 규합하여 초나라로 쳐들어갔고 5차례의 치열한 접전 끝에 수도에 입성했으나, 초나라 소왕은 이미 탈출한 후였다.

부친과 형의 복수로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의 시체를 꺼내 3백 회의 채칙질로 복수 한다.

 

훌륭한 병법가였던 오자서의 활약으로 서쪽의 초나라. 북쪽의 제와 진()나라를 위압하는 사이, 남쪽에 있던 월나라가 오나라와 충돌하여 월왕 구천(句踐)의 기습으로 오나라는 패하고, 오왕 합려는 발등에 맞은 화살로 인한 파상풍으로 아들 부차에게 복수를 부탁하고 숨을 거둔다.

 

새로운 왕이 된 부차는 장작더미에서 잠을 자며 복수를 다짐하고 모사 오자서를 중심으로 군사를 조련했다. 준비가 덜된 월나라는 중원의 주인이 되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기원전 494년 정병을 출동시켜 전쟁을 벌였으나 역부족. 오나라 군사는 부초산에서 월군을 격파하고 승승장구하여 월나라 수도 회계를 포위 압박하자, 마지막 남은 5천의 군사로 더 대항 할 수 없음을 간파 후일을 도모하고, 월나라를 오나라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신하가 되고 아내는 첩으로 바치겠다는 굴욕적인 항복을 제의하며 화의를 요청하자, 오자서는 ‘지금 월나라를 멸망치 않으면 나중에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라고 간곡한 반대 진언을 했으나 오왕 부차는 월왕 구천과 강화를 맺었다.

 

오왕 부차는 구천을 데려와 선왕 합려의 무덤을 돌보는 일을 시켰으나 절대복종으로 부차의 신임을 얻어 결국 석방되고, 모사 범려의 책략을 기본으로 착실하게 내실을 다져 군대를 양성해서 10년의 인고 속에 수수한 옷을 입고 식사 때마다 매달아 놓은 곰의 쓸개를 핥으면서 절치부심 복수의 칼을 간다.

모사 범려는 부차에게 수로를 파서 제나라를 공격하고 중원의 제왕이 될 것을 책략으로 내세우고, 월왕 구천은 범려의 아내였던 서시를 오왕에게 바치는 미인계를 써서 서시(西施)의 교태에 빠져 정사를 소흘히 하고 국력을 약화시키자, 쓴소리를 하던 오자서를 정적의 모함으로 죽게 하여 잘못된 전략으로 제나라를 공격하여 힘이 약해진 오나라를 월왕 구천은 기원전 473년 오나라 수도를 포위하였고,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말이 옳았음을 알았지만, 때 늦은 후회를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양자강 하류 지역의 패권을 잡은 구천은 북으로 진출하여 제, 진등 여러 나라와 서주(徐州)에서 회맹했다. 동방제국은 구천을 패왕으로 받들어 오나라를 대신하여 춘추전구구시대의 최후의 패자가 됐다.

 

월왕 구천의 밑에서 모사로 있던 범려는 구천을 떠나면서 오나라 책사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는데, 그 속에는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오월동주로 시작해서 와신상담하면서 토사구팽으로 끝난 이야기의 말미에 천하절색 서시를 데리고 떠난 범려는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을까?

 

*호남성 장가계(湖南省 張家界)-진나라의 멸망.

 

초한지의 마지막 부분은 진시황의 나라가 여기저기 종기가 곪아터지듯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군사들로 인해서 우리가 즐겨 두는 장기판의 초나라와 한나라가 남게 된다. 한나라의 항우는 마지막 왕비 우미인마저 등을 돌린 상태에서 맨손으로 산을 뽑는 역발산기개세의 힘을 가졌지만, 군사 범증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한번 주군은 영원한 주군이러 여기고 끝까지 의리를 지킨다.

 

유방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우대하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지만, 계락이 천리 이상 떨어진 곳에서의 책략에 앞선 장량. 군량미가 끊어지지 않게 보급을 책임진 소하. 백만 대군을 이끌어 연전 연승하는 한신. 이들 모두 유방보다 뛰어나지만, 사람을 가려쓸줄 아는 지혜가 출중한 유방은 주변 사람들을 잘 이용해서 마지막 초나라와의 해하(垓下)전투에서 항우는 포위되어 초나라의 노래를 듣게 된다. 이게 사면초가(四面楚歌).

우미인은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알고 최후의 주연을 베풀고 스스로 자진한다. 이 사건이 후대의 패왕별희(覇王別姬). 항복하라는 권유에 불 같은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서 적진으로 돌진을 하지만, 순간 적장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목숨에 큰 포상이 걸려 있다는 걸 아는 항우는 스스로 자진한다. 전리품으로 항우의 사지를 얻은 사람에 의해 포상이 걸려 있기에 항우의 몸은 다섯 조각으로 나눠 결국 초나라는 다섯 조각으로 나뉜다. 그리고 토사구팽을 염려했던 장량은 미련 없이 떠나 호남성 서북부 무릉 산맥에 자리한 산 속에 숨는데, 우방의 군사를 피해 49일이나 황석채 바위에서 버텼다 한다. 2200년 전에. 장량의 후손들이 바로 오늘 날 장가계를 이뤄 가문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섬서성 서안(陝西省 西安)은 진시황능(秦始皇陵)이 있는 곳으로 13세에 제위에 오른 때부터 자신의 능묘를 만들면 장수 한다는 조묘관습 때문에 수인 70만 명을 동원하여 삼천의 깊이까지 착굴해서 동을 부어 현실을 만들고 궁전과 문무 백관의 상이나, 갖가지 진귀한 물건들로 묘실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혹시라도 도굴자가 들어오면 사살되도록 자동 발사되는 석궁기관장치를 설치했다. 진시황은 이런 보물들과 장치들이 알려질까 염려하여 관을 안치한 공인들이 현실 문을 잠그고 출구로 연결되는 연도로 나왔을 때 출구를 막아 전원 생매장 시켰다. 높이 122m. 주위 5리의 분구를 쌓고 초목을 심어 산처럼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능묘를 조성했다. 그러나 진시황이 죽은 지 3년 만에 그의 초대형 능묘는 진의 멸망과 더불어 파괴 되고 만다.

 

누가 그랬을까? 바로 항우다. 항우는 아방궁을 불태우고 이어 진시황제 능묘도 파괴 했는데, 관에 들어가 이를 헤치고 30만 명을 동원하여 30일 동안 물건을 날랐으나 다 나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도적 떼들이 곽실을 녹여 동을 훔쳤다고 한다. 파괴되고 약탈당한 진시황의 능묘가 원래 얼마의 규모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살아생전에 외적의 흉노족의 침입을 두려워해서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진시황이 사후 세계에 가지고 가고 싶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도 죽음을 두려워해 평생 늙지 않는 불로초를 캐러 동남동녀 500명을 한반도의 삼신산에 보냈다고 하니 정녕 그가 두려워한 것은 사후세계의 안락한 삶이 아니라 살아 생전의 건강하고 멋진 모습이 아니었을까 상상만 할 뿐이다.

 

*대리석의 고향 따리.

 

운남성(雲南省) 서부에 위치한 대리(大理)의 서쪽에 있는 창산 산맥의 창산 이라는 곳에서 채취되는 돌이 나무도 유명하여 대리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가 건축물을 지을 때 쓰는 바로 그 대리석이다. 대리석의 종류로는 창산 대리석, 채화석, 운회석, 백석, 흑석 등으로 나뉘는데, 정작 대리석의 본 이름과 사용하고 있는 대리석의 종류를 제대로 알고 쓰는 지는 모를 일이다.

 

*중국의 4대요리. 사천. 광동. 상해. 북경.

 

사천성을 중심으로 산악지대 영향을 받은 스촨요리는 중국내륙의 사천, 귀주, 호남 등지에서 발달한 것으로 내륙의 분지인 지역적 영향으로 더운 여름에는 음식의 부패를 막기 위해 향신료를 많이 사용한다. 특히 매운 요리의 기본 재료인 고추, 후추, 마늘, 파 등을 많이 사용하여 맵기로 유명한데,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혹독하게 추워서 매운 음식을 통해서 땀을 내거나 몸 안에 열기를 만들기 위해 고추를 많이 쓰기 때문이다.

 

광동성을 중심으로 복건성, 광시족자치구에서 주로 먹는 요리를 통칭. 네발 달린 것은 책상 빼고 요리를 해 먹는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요리가 있다.

 

샹하이 요리는 바다가 가까운 양자강 하구 난징(남경)을 중심으로 발달 되었기 때문에 해산물과 미곡을 이용한 요리가 많으며, 간장과 설탕을 사용하여 달고 진한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베이징 요리는 북경을 중심으로 한 궁중요리가 발달하여 청나라 때에 그 절정기에 이른다. 베이징 요리는 튀김이나 볶음 요리가 발달했는데, 특히 북경 오리구이가 유명하다.

 

*소설 서유기의 무데 화염산.

 

기원전 3세기 인도 마우리 왕조 3대 아소카 왕은 인도 전역을 통일하고 불교를 전파했다. 참혹한 정복전쟁 후 불교에 귀의 하여 갠지스 강 유역에 봉안된 석가모니 사리를 발굴해서 인도의 주요지역에 배분했고, 불교를 공식적으로 전파한 최초의 대왕. 기원전 6세기 인동의 동북부 일우에서 발생한 불교는 아소카왕의 불교 포교단에 의해서 스리랑카, 미얀마,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 그리스, 북 아프리카 등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3 대륙 여러 곳으로 공식적인 포교단을 파견하여 북인동의 지방 종교인 불교를 세계종교로 격상. 현재 인도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스리랑카의 실론은 최초 불교 전파지인 동시에 소승불교를 기반으로 한 남방 불교권의 중심지가 됐다.

 

기원후 9세기경 서아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 지역을 망라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범 아시아적 종교가 됐다. 이렇게 확산된 것은 계급과 신분적 차별을 극심하게 강요하는 브라만교의 질곡과 관습을 깨고 만민평등 사상을 제창하면서 하층민을 포함한 모든 중생이 중도를 따르면 누구나 구원을 받으며 열반에 도달 할 수 있다는 보편 타당한 교리를 들 수 있다.

 

명대의 작가 오승은이 지은 소설 서유기. 삼장 법사 현장-여기서 삼장 법사란 부처의 설법을 모은 경장(經藏), 계율을 모은 율장(律藏), 연구 논석(論釋))을 모은 논장(論藏)을 모두 통달했다고 하는 데서 삼장법사란 칭호를 준다-이 제자인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를 데리고 불경을 구하러 서역으로 가던 중 화염산이 가로막아 불을 끄고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요괴 마찰녀와 그녀의 남편 우마왕을 물리치고 무사히 통과 하였다는 곳.

 

영상 45도를 웃도는 무더운 사막. 연간 강수량이 17mm 로 중국에서 가장 건조한 곳이며’화로’라는 별칭이 들을 정도로 가장 더운 지역. 건포도의 고장이라고 한다.

그럼 사막에 포도 생산은 어떻게 가능 할까?

 

신장성은 세계최대의 사막인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운데 두고 북쪽은 하미와 투르판, 우루무치로 이어지고 동쪽은 누란과 케르첸, 호탕카슈갈이로 이어지는 오아시스도시가 자리잡고 있다. 메마르고 건조한 사막의 오아시스는 화염산 북쪽 천산산맥의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땅속으로 스며서 흐르는 물을 인공으로 여러 개의 수직우물을 파서 땅속으로 연결시켜 지하수로를 만들었다. 수로를 통해 천리를 끌고 와서 인공 오아시스를 만들고 인공 냇물을 만들어 몇 십 리씩 포도원을 조성하여 농사를 짓게 만든 것이 카레즈다.

이슬람 세력이 들어온 11세기경부터 물의 증발을 막기 위해 지하수로를 파고 부득이 지상에 육로로 만들 수 밖에 없을 경우에는 누수를 막기 위해 바닥을 벽돌로 쌓고 콘크리트로 손질해 놓았다. 투르판 분지의 카레즈는 1237개가 있고, 총길이가 5000Km 가 넘으며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대 공사로 만리장성, 남북을 연결하는 운하와 더불어 최고의 걸작인 것이다.

 

200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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