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영화 “ 자유부인”을 보고
시대의 변화는 있지만, 언제나 상류사회를 표방하는 문화적 선도자는 또 다른 세계처럼 묘사된다.
가령 18세기의 마리 앙트와네트의 인생사가 과학적 발전이 뒤졌다고 해서 문화적 그림자가 뒤 쳐졌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문화를 선도하는 그 무엇인가는 항상 앞서가는 길잡이 역할이리라! 다만, 그것이 옳은 방향의 수레바퀴든, 역행하는 방향인가는 먼 후일 역사가들의 판단의 몫이 아닌가 한다.
올 곳은 길을 가는 장태윤 교수. 자신의 법을 정하고 사회적 윤리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서의 미스 박과의 데이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울타리의 안쪽에 둔다.
급변하는 경제 관념 속에 교수 부인의 삶에서 탈피. 양품점 마담이라는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오선영은 자유를 찾아 떠나는 한 마리의 이리가 된다. 명사 부인인 동창생 최윤주를 만나고 나서 자유시장의 유혹에 스스로 빠져드는 경험을 하지만, 그건 제 발로 자신의 코스를 걸어가는 순서일 뿐이다.
옆집 청년 신춘호로부터 댄스를 가르쳐 주겠다는 제의를 받고 친구 윤주로부터 동창모임 속의 댄스파티 초대를 받고, 자금을 만들기 위해 늑대 굴 속에 미끼를 던져 놓고 기다리는 사기꾼 백광진이 펼쳐 놓은 덫 속으로 선영은 스스럼 없이 끌려들어간다.
미혹의 끝은 어디인가? 윤주는 친구들의 돈을 모아 계를 짜고 그 돈을 바탕으로 밀수품에 손을 대고 또 다른 늑대는 먹이 감을 노리고 돈을 쥐고 홀연히 사라진다.
선영을 향한 유혹의 손 길은 양품점 주인인 한사장의 집요함에서 남자의 볼품없는 근성이 나오고, 달콤한 듯 했던 한사장과의 로맨스는 위험한 도박으로 비극의 끝을 알린다.
시대적 흐름이 21세기인 지금의 문화적 배경이야 그 끝이 없는 극한의 경지에 까지 도달해 있다 하지만 1950년대 전후 시대 상황에서의 밑그림을 염두에 둔다 하여도 댄스파티에서의 분위기를 휘어잡는 댄서 나복희의 반라에 걸친 의상에 어울리는 춤과(이 장면에서 외화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 열연했던 세기의 배우 마를린몬로가 기타를 튕기며 “원 실버 달러”를 부르던 영상이 겹쳐지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 동창모임에 나타나 아베크 토요일을 열창한 가수 백설희의 모습은 요즘 영화의 어느 한 부분에 도입된다고 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정도의 시대를 앞서간 영상이었다.
한 잔 술에 취해 자신의 중신에서 흔들리기 시작한 순간 어느 선까지가 허용의 한계치 인지를 가늠하지 못한 수 많은 여인들의 치마바람-춤바람이라고도 한다- 의 소용돌이에 녹아버린 애절한 인생 드라마가 어디 한 두 편이랴! 그 손을 맞잡은 유혹의 끝에는 광기의 눈을 번뜩이는 하이에나 같은 바람난 수캐가 있었다. 손 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하지 않은가?
본인의 개념에서 넘지 않았어야 할 선에 대한 정의가 사회적 가치기준과 개인적 가치의 판단이 애매모호한 설정이라면 오늘 날의 도덕적 기준으로 삼는 자유부인의 설정과 또 다른 이면의 자유남편의 영역이 어떤 것이 표준인지는 보는 이의 가슴마다 다 다름이 정답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