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산 눈 길을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몇 일 전 계방산에 등산 간 마나님께서 눈이 없다고 차를 돌려 무등산 60Cm 의 눈 속에 빠져 다녀왔다고 자랑을 했다. 서석대의 설경이 그림보다 더욱 아름다웠다고 한다.
나도 일년에 한 번쯤은 눈 길을 걸었지! 지난 해에도 설악산 밤길을 눈 속에서 헤 메이다 왔다고! 그래서 이번에는 혼자 갑니다.
새벽을 가르고 달리던 버스가 문막에서 잠시 쉬고 바로 안흥을 지나 부곡공원지킴터에 내려주고 얼어붙은 주천강쪽으로 빠진다.
입구에서 등반대장의 구령에 따라 스트레칭이 시작될 무렵 내리기 시작한 싸락눈. 이게 오늘 산행의 시작이었다. 초로에 진입하면서 오늘은 날씨가 춥지가 않아서 반팔차림이 좋겠다고 흘린 농담이 아마도 눈을 불러왔나 보다. 적당한 눈을 맞으면서 걸으면 어때? 하고 시작한 게 화근이라도 된 듯 함박눈이 펄펄 내린다.
곧은재에 도착 기념사진 한 장 남기고 가려니 다른 곳에서 온 듯한 산악회는 한참을 회의하더니 미련 없이 하산 한다고 내려간다. 오늘은 첫 산행인 후배와 후배부부가 있는데 고생 좀 되겠다.
향로봉을 향해 가는 길은 남북으로 이어진 능선에 말 그대로 서풍 한설이 몰아치다 보니 오른쪽 뺨을 내놓고, 사선으로 내리 긋는 눈 길에 두들겨 대는 뺨이 따갑고 얼얼하다.
더위를 식히려고 외투를 벗고 내피만 입은 상태여서 머리나 어깨에 쌓인 눈이 체온에 녹아 등을 타고 땀과 함께 흘러 엉덩이까지 축축해진다.
향로봉에 도착. 새벽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온 터라 이미 허기가 져서 출출 한데, 어디 자리 펴고 앉아서 먹을 곳은 없다. 계속 가는 수 밖에. 이종수부회장님이 건넨 사과 한쪽을 이지수차장과 씹으면서 남대봉을 간다. 이 눈보라 속을 뚫고 3.9Km의 거친 행군이다.
2006년에 이곳을 지날 때에도 그렇게 많은 눈이 있었지만, 그때는 눈이 오고 난 후여서 하얀 설백의 나라에 푸른 창공이 조화되어 바라보는 곳마다 마치 한 장의 그림 같은 산행과는 사뭇 비교가 된다.
가다 보니 우리 팀보다 앞서가던 모처에서 온 산악회와 겹쳐졌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많다 보니 조금만 오르막이 나오면 바로 정체가 되고 만다. 섰다. 가 다를 반복하면서 느린 진행으로 겨우 앞으로 간다. 우리도 언젠가 나이 들면 저 분들처럼 최선을 다해도 저럴 것이다. 다리 힘도 빠지고 호흡도 가쁘고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고 하지 않은가?
트로이 전쟁에서 목마의 전법으로 승리한 키르케는 그리스로의 귀환을 하면서 오딧세우스에게 세이러스가 사는 섬을 지날 때 절대 노랫소리를 듣지 말라는 조언을 한다. 이유인 즉, 그 노랫소리가 너무 매혹적이어서 노래에 취해 황홀경에 빠지면 넋을 잃고 배가 암초에 부딪혀 좌초되고 만다는 전설의 노랫가락. 능선을 타고 지날 때 선연 듯 뒤를 돌아보면 유혹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앞만 보고 걷는다. 돌아보지마! 돌아보지마!
어떤 이유에서 인지 잘 모르지만 앞서가던 어느 분이 뒤를 돌아보다가 발이 빠지면서 눈 구덩이 속으로 구른다.
어느 곳에는 휘 돌아가는 모퉁이에 천 길 낭떠러지기는 아니지만, 족히 수십 미터는 될 듯한 아찔한 곳에 눈까지 덮여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연출하기도 한다.
걷다 보니 아이젠에 달라붙은 눈은 마치 배 뽈록한 복어의 모양처럼 눈이 엉켜 붙어서 수시로 털어내지 않으면 신발자체가 또 하나의 장애물이 된다.
휘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한 그 애절한 목소리는 어느 님의 그리움일까? 더러는 G음의 낮은 허밍으로 흘러간 옛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걷다 보니 서서히 눈이 그치고 희뿌연 그름 속에 떠오르는 해. 축축하게 젖은 상태에서 도착한 남대봉. 수북하게 쌓인 눈을 치우고 자리를 잡고 허기진 식사를 나눈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설 즈음해서 오늘 처음 산행을 하는 후배 일행이 도착을 하고 다시 장갑을 끼려 하니 속에서 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이미 손가락에는 감각이 없는데, 혹여 동상이나 걸리지 않을까 해서 겨우 장갑을 끼고 치악산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다는 영원사 방향으로 하산 길을 잡아 여성회원 몇 명을 앞세우고 천천히 내려선다. 더러 미끄러져서 철 푸덕거리는 소리와 급경사가 심한 곳에서는 아예 엉덩이를 내려놓고 썰매로 미끄러지는 걸 보면서 눈 그친 계곡에 훈 풍이 불어서 인지 뭉텅이 진 눈들이 뚝뚝 떨어진다. 이크! 에크!
얼마쯤 내려섰을까?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줄기가 갈라져 길을 막고 누운 체로 오가는 길 손은 다른 길을 찾는다. 세상을 선하게 살라 하심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저처럼 나무가 부러지거나 바위가 굴러 내려서 본의 아닌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 않게 하늘의 보우하심일 게다.
영원산성과 영원사를 지나 금대 분소 주차장에 도착 스트레칭을 하면서 오늘도 무사히 산행을 도와 준 다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풀어주고, 집행부에서 준비해둔 까페를 찾아가 동동주 한 잔과 도토리 묵으로 뒤풀이를 한다.
안개 자욱한 국도를 돌고 돌아서 무사한 귀환으로 눈꽃 산행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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