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 눈길. 달빛을 벗삼아 걷다.
그대. 고독의 심연을 어디까지 느껴 보셨는지요? 삶이 외롭고 힘들다고 느껴질 때 구하고자 하는 화두는 무엇이었는지요? 고고한 달 그림자를 밟고 찬란하게 부서져 내리는 별들과의 대화를 나누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머릿속이 명료하게 떠오르는 별 하나를 그리면서 설악의 능선을 함께 가 보시지요.
산행을 하면서 얻은 것이 있다면 오욕칠정의 욕심을 잠시 내려 놓고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마음이 정화되는 자아의 세계 속에 홀로 걸어가는 나를 발견하는 깨달음의 순간이나마 잠시 느껴본다는 것이지요.
한계령 휴게소에서 뒷길로 이어지는 초입에는 추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모두 둘러싸서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중무장의 상태로 새벽 3시 반의 정적 속에 아이젠에 밟히는 눈들의 비명과 스틱의 삐걱 이는 마찰음이 앞으로 이어질 13Km의 산행에 동무되어 갈 것이다.
머리가 추울까 봐 빵모자를 눌러쓴 덕분에 추위는 면했지만, 헤드랜턴의 목이 자꾸만 앞으로 꺾여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랜턴을 벗어 주머니에 넣고, 은백의 설원에 고고하게 비추는 달빛에 의지해 눈의 정령들이 눈 들고 환영해 주는 능선 길을 따라 어느 님의 수고 였는지 1m도 넘게 내린 눈을 처음 럿셀해 주신 덕택으로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마치 한 발이라도 빠져 버린다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을 들어설 것 같은 미지의 두려움으로 뽀득이면서 사각거리는 눈 길을 급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은 가슴 속에 퍼지는 행진곡의 리듬에 맞춰 진행을 한다.
능선에 접어드니 저 멀리 바닷가를 표시하는 경계선인 냥 옹기종기 모여 앉은 불빛들이 지금 이 시간 포근한 잠자리의 따뜻했을 이불 속처럼 가물거리는 낙점이 군데군데 피어있고, 걸을 때의 열기와 흘러내리던 땀들이 모자 가장자리부터 얼어붙어 고드름처럼 매달리는 형상으로 잠시라도 멈출 량이면 금새 몰려드는 한기가 엄습을 해서 쉬는 것도 자유롭지가 않다.
함께 시공을 공유하고는 있지만 저 앞서가는 일행이 누군지, 또 저 뒤에 불 밝히고 오시는 분이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모두들 덮어쓴 모자와 얼굴까지 가린 마스크로 뒤덮여 어둠 속의 눈 빛 만으로는 분간이 어렵습니다.
산 속에서 열린 마음으로 서로의 안녕을 묻고, 안전한 산행을 빌어주며 길을 비켜주는 선한 마음으로 세상 이웃들이 산다면 참 좋은 세상이 되겠다는 생각은 나만 느끼는 게 아닐 것이란 믿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동행.
내가 가는 이 길이
천만년 이어질 듯 보이지만
어쩌면 저 굽이 꺾이는 곳까지 인지도 모릅니다.
반짝이는 눈 빛을 담아
눈의 요정처럼 펼쳐진 당신의 사랑
되도록 밟지 않으려 피해도
발 아래 펼쳐진 피할 수 없는 당신의 마음 밭.
무릎 꿇고 입맞추고 움켜쥐고 싶어도
한 방울의 물로 변하는 사랑입니다.
이 길이 다하는 그 날까지
이 삶이 다 하는 그 날까지
우리는 언제나 동행입니다.
공제선 너머 푸른 빛이 감도는 허공으로 사선을 그으면서 별들의 유성이 떨어진다. 하나 하나마다 깊은 사연을 안고 살아있는 별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합니다. 오늘 또 내일 이 길을 지나는 나그네의 밤 이야기를 들려 주는 친근한 길 손이 되겠지요.
끝청을 지나고 중청을 향해 가는 어디쯤부터 동녘 하늘이 붉은 색 밑그림을 채색하면서 어둠 속의 산하가 기지개를 펴고 세월이 다해 죽은 고사 목의 앙상하게 남은 뼈대가 여명을 배경으로 절경이라는 설악의 이름 값을 더 한다.
거대한 대청봉과 그 움푹 들어간 틈 사이로 중청대피소가 실루엣 상태로 드러나면서 미명에 밝아지는 모습만큼이나 일행들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드러난다. 사진을 찍기 위해 손을 꺼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시려오는 손. 그나마 바다 건너온 거센 바람이나마 없었음을 위안으로 삼고, 오랜만에 고향집을 찾은 듯한 감정으로 중청대피소에 도착 아이젠을 벗고 취사장에 들어가 먼저 온 동료들과 도시락을 나눠 먹는다.
이 곳은 장소가 넉넉하지 못한 터라 재빨리 식사를 마치고 방을 빼 줘야 다음에 도착한 산 객들도 허기진 배를 채우리라는 생각으로 다시 배낭을 추스르고 밖으로 나와보니 그 새 해는 떠서 대청봉에 가려진 햇살이 온 누리를 환하게 밝힌다.
설악산에는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자리하고 있는데, 키 높은 순서대로 자리를 정하면서 대청봉, 중청봉, 소청봉 끝청봉 그리고 작으면서도 거만을 피워 자리다툼에 앙탈을 부린 봉우리 하나를 대청봉이 주제 파악하라고 귀 싸대기를 한대 올려 붙이니 저 멀리 밀려나 귀때기 청봉이 되었다는 전설이 재밌기도 하거니와 오늘 날 제 분수를 모르고 거드름 피우는 귀때기 봉 같은 사람은 없는지 생각하면서 대청봉으로 올라가는 길. 동해 바다를 거쳐온 바람에 정말 귀때기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추위에 귀마개 위에 빵모자를 쓰고, 그 위에 산악회 모자를 얹고 방한모자까지 뒤집어 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대청봉 표지석을 잡고 기념사진을 남긴다.
이젠 하산 길. 불과 몇 발자국 건너갔을 뿐인데, 정말 거짓말처럼 서쪽 길로 접어들자마자 봄날 같은 따뜻함을 느끼고, 하나씩 뒤집어쓴 모자를 벗고, 이세은 차장과 최성원 직장과 한 팀이 되어 이방인 일행을 먼저 보내고 쉬운 하산길이 될 것이란 생각으로 출발 하였으나 오색 내려가는 5Km는 그야말로 지옥훈련의 난 코스였으니, 너무 많은 눈이 내려 계단을 덮고 대부분의 계단은 45도 가파른 경사로 눈 길로 이어져 있으니 아이젠을 신은 상태에서도 자칫하면 미끄러지기 일쑤여서 다리에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한 여름이나 가을 같다면 룰루랄라 콧노래라도 부르면서 잽싸게 내려왔을 그 길을 2시간여 걸쳐 가다 쉬 다를 반복하면서 하산을 한다.
내려서다 설악폭포 즈음에서 만난 산 객. 행색이 젊은 부부 사이인데, 물통은 얼어서 물이 있어도 못 먹고 하소연만 하는지라 함께 나눠 갈증을 풀고, 좀 천천히 내려가는 여인네를 타박을 한다. 그래서 한마디 참견을 했다. 만일 동행인이 다리가 아프다고 나 자빠지면 업고서라도 내려가야 할 터인데, 그냥 그러려니 하고 안전하게 내려 가시지요.
오색에 도착. 오색 식당에서 황태 해장국으로 식사를 하고, 후미가 도착할 때까지 3시간 넘게 지루하게 기다리면서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도착하기를 비는 마음으로 오색약수도 한 잔 마시고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새로 선임된 임원진들의 소개와 다음 산행의 시산제 계획에 대한 김정훈 부총무의 안내를 받으며 무지근한 다리와 가슴 벅찬 추억을 가득 안고 눈꽃 산행의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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