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여자 속<그 가을의 사랑> 오정희 作
급성 간염 진단을 받은 남편이 입원한 지 스무날만에 거짓말 같이 세상을 뜨자 서른두 살 그녀는 졸지 어린 두 아이들을 거늘인 미망인이 되었다. 비탄과 슬픔과 원망으로 첫 해를 보내고 두 해째 접어들자 살아야 한다는 진리가 무서운 현실로 다가왔다.
그녀는 일을 시작했다. 갖가지 레이스 뜨게 장식품을 만들어 수예점에 납품하는 일이었다. 남달리 눈썰매와 손재주가 있어 뜨개질과 수놓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친구나 친척들의 경사에 자신의 작품을 선물하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이제 그것이 생업이 되어야 하는 현실에 가끔은 서글퍼지곤 했으나 그럴 때마다 자신의 쓸모없고 소모적인 감상을 비웃듯 더욱 맹렬히 일에 매달렸다.
아파트에 빈터에서 굴렁쇠를 굴리는 청년과 그를 뒤따라가며 깔깔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아이들은 아빠가 등에 올라타 장난을 치며 드높고 맑은 소리로 웃곤 했었다. 그리고 그 뒤 엄마와의 단조롭고 조용한 생활에서 아이들은 그러한 웃음을 잊고 잃었다.
요즘에도 굴렁쇠가 있다니, 껑충하게 키가 크고 마른 청년이 굴렁쇠를 굴리는 모습과 즐거운 흥분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그 뒤를 따르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그녀는 가만히 몸을 돌렸다.
스물여섯의 청년은 거의 매일같이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청년이 나간 뒤 그녀는 거울을 보며 서른다섯이라는 자신의 나이 지나간 삼년 간의 세월을 생각했다.
비는 밤새 내렸다. 깊은 밤, 홀로 깨어 듣는 빗소리는 얼마나 외롭고 사랑의 느낌처럼 감미로운지. 비는 함빡 그녀의 가슴으로만 내리는 듯 했으며 아득히 먼곳으로부터 소리 없이 다가오는 발소리, 손짓과도 같았고 기쁨도 즐거움도 없이, 다만 살아내야 하는 메마른 삶이 억울하지 않은가, 새로이 무엇을 무언가 시작하기에는 아직 너무 늦은 나이가 아니라는 것 속삭임과도 같았다.
생은 향유가 아닌 의무로서 그녀 앞에 끝없이 지루하고 적막하게 놓여 있었다
청년은 다시 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곧 청년을 잊었고, 그녀는 어느 때와 다름없이 저녁에 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해가 바뀌면 학교에 가게 될 큰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겨울의 끝 무렵, 그녀는 두텁고 포근한 털 스웨트를 완성했다. 포장해서 들고 집을 나서기 전 거울을 보며 겨울 동안 눈 밑에 깊이 파인 주름살과 훨씬 늙어버린 얼굴에 안도했다.
눈이 녹은 숲길에는 지난해의 낙엽이 쌓여 있었다.
숲길을 벗어나자 눈을 찌르며 가로막는 것은 골짜기를 사이에 둔 맞은편 등성이에 엉성한 2층 콘크리트 건물과 주위를 두른, 두 길은 될 듯한 철조망이었다.
'자혜정신요양원'
바로 그때 건물로부터 들려오는 찬송가 소리 때문이었다. 청년의 휘파람으로 '내 주를 가까이'었다.
망상증이라는정신 병으로 젊음을 보내는 그 청년.
가을바람처럼 잠깐 스쳐간 3년. 사랑의 망상이었다.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인의 후예. 황순원 作. (1) | 2025.02.20 |
---|---|
봄날은간다. 이윤기 作. (1) | 2025.02.17 |
풍류. (0) | 2025.01.21 |
장길산 1.광대<재인말>. 황석영作 (0) | 2025.01.12 |
어떤 날. 하루. (1) | 2024.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