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길산 1.광대<재인말>
"거참 통쾌한 말이로구나. 사나이가 인정하고 의리 빼면, 귀 빼고 좆 뺀 당나귀 아니라우."
" 그냥 헤어지려니 목이 말라서 안되겠군."
"여기에 거 술 좀 가져오게. 이별주가 없을 수 있나."
그들은 강변 자갈에 털퍼덕 주저앉아 화주 한 병을 털어붓기 시작했다. 박대근이 허공을 한참 올려다보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 아우님들 내 옛말 하나 하고 가리다."
" 옛말 조오치."
" 일찌기 한양 땅에는 일 않고 놀고 먹고 좋은 입성에 허우대만 멀끔하여 약간의 입담재조와 계집 후리는 솜씨를 가지구서 기생년들 기둥서방이나 하는 놈들이 무수하게 있소. 기중에는 내 아는 오입 쟁이 한 녀석이 있었는데 이자가 다방골에서 서문 밖 홍재원, 남문 밖 잰배들(紫岩)에 이르기까지 한 집 건너 두 대문 세 기방에 드나들며 기생 년들 오줌을 잘잘 싸도록 만들었거든. 하여튼 이렇게 주지육림을 헤매다가 반 평생을 보냈지. 나이는 들지, 양기는 쇠락하고, 다리는 후들후들, 한번 올라갔다 내려오면 눈앞에 안개가 서리고 일월성신 북두칠성이 뱅뱅 돈 단 말이렷다. 한 입 건너고 두 몸 건너 소문과 내력이 파다히 알려지니 재 깐 놈이 몸 부칠 곳이 있나.
에라, 花無十日紅이요, 權不十年이라는데, 오입쟁이의 말년에 어디 기댈 곳은커녕 그냥 맞아 죽기도 꼭 알맞은 지라, 한양을 떠나리라 작정하고 팔도강산 유람을 나섰소.
물은 흐르는데 구름 가는 곳은 어디메뇨, 허망한 인생이 로구나! 예전에 뒤 보아주는 무뢰배나 있었건만, 일시에 몰락하니 어느 년 하나 배꼽 맞추잔 일 없고, 어느 놈 술 한잔 사는 이 없어 저자에서 따귀를 맞아 입술과 코피가 터져도 혀끝 한 번 두드리지 않는구나. 간혹 길을 가다가 들 밥 먹는 농부들 틈에 기웃기웃 기장밥이나 보리밥이라도 얻어 걸릴까 논두락을 걸어가건만, 제 놈이 여름철엔 시원한 데 찾아 놀고, 겨울철엔 따뜻한 데 찾아 놀고 쉬고 일 한번 못해본 놈이 손가락은 산수 냉천의 은어 뱃바닥 같이 새하얗고 매끄럽지. 손 본 농부님네들은 천하지대본 장대를 세워놓고 만 장이 뚝 떨어져 에이, 여보 양반이 들밥을 자시다니, 그냥 내처 길이나 가오, 한단 말이우.
이렇게 흘러 다니는 중에 폐의파립 꼴이 되고, 몰골은 폭삭 늙어, 오래된 과부 월경서답 꼴루 벽촌서 논두락을 베게 되었는데, 사람이 고생을 좀 해보니까 철이 조금씩 들어간 지라, 내 어디 가서 남들처럼 땀 흘리고 일하며 내 밥 찾아 먹으리라 작심하잖않았겠소.
걷다 보니 저기 두만강 변경에 회령까지 갔겠다. 성문을 지나는데 방이 붙었거늘 명필을 구하오. 글을 써주면 오백냥을 주리다. 하는 소리였지. 견물생심이요, 사람은 근본에 따르더라고, 이 파락호가 사심이 안 될 리가 없었수.
찾아갔지.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날아갈 듯 서 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거 세 가지가 있소그려, 산에 범이 무섭고, 미친놈 칼자루 잡은 것이 또한 무섭고, 무식한 놈 돈 가진 것이 더더욱 무섭거든. 이 부가옹 나리가 금병풍을 가졌는데 글씨 받아 치장하려고 잔뜩 기다리다가 자칭하여 찾아든 파락호에게 버선발루 뛰어 나왔것다. 허어 흠, 허어 흠, 우선 심기를 돋아야 하니 서른 날 만 진탕 놀게 해주오. 그날부터 산해진미에 말 타고 칼 잘 쓰는 북변기생 모두 모아다 풍악을 잡혀 연일 잔치 하니, 서른 날이 마치 무릉도원의 일각이라.
허어 흠, 허어 흠, 이번에는 붓을 골라야 하는데 수종드는 예쁜 종년 하나 붙여두고 몸 부신 좀 하게 해주오. 서른 날 동안 양기를 길러야 하오. 서른 날이 또한 옹기장수 지겟작대기 차듯 지나갔겄다.
흐흠, 허어 흠 이번에는 먹을 한 동이 갈아줘야 하니 과수댁이나 하나 넣어두고 메시중이나 들게 해주오. 서른 날이 더욱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
드디어 안달이 오른 주인 양반 의심이 부쩍 들어 재촉하고 볶아치며 핍밥할 제, 이제 열흘 말미를 주겠으니 그때까지 하지 않으면 관가로 넘기겠단 말이렸다.
열흘이 흉년의 뻘건 해보다 더욱 길어! 밤마다 엎치락뒤치락 이 공리 저 술수 생각 중에 달아날 길 밖에 없었겠지. 그래서 마지막 밤이 되어 옷을 주섬주섬 싸들고 발끝 걸음으로 일어서는데, 허, 갈 데가 없구나. 두만강 끝에 와서 어디로 간단 말이냐. 이날 짧은 밤이 사나이 평생이라, 눈앞에 다가섰으니 발이 떨어져야지.
까짓 거...... 쓰고 말리라. 결단 하자마자 일어서서 왕붓 꼬나들고 항아리가 그득한 묵을 푹 찍어서 병풍 끝에서 저쪽까지 한일(一)자를 쭉 긋고 문지방에 다리 걸려 고꾸라지니 섬돌에 해골이 깨져 피가 낭자 했단 말이우.
자, 이 꼴이 되어 주인양반 노기가 충천했으나 별도 리가 있나 오다가다 걸린 건달놈께 병풍 버리고 엉뚱한 송장 치우게 되었지.
헌데, 몇 년 있다가 강 건너 되 사람 중에 박물군자 하나가 지나가다 보니 남쪽으로 훤한 서기가 뻗쳤어. 서기를 따라 부가옹 나이 대문 앞에 이르렀지. 문을 두드려 사유를 말하고 박물이 있는가 물었더니, 고개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다가 버린 병풍이 광에 하나 있소. 보여주오. 그래. 데려가 광 문을 여니 이 박물군자가 무릎을 닥치더란 말이우. 커어, 사람 한목숨 들었고나.
그 오입 쟁이 녀석, 미루고 미루다가 온 평생이 코앞에 물리칠 제주가 있나. 마지막 기를 몽땅 쏟있으니 억만 전의 박물이 되었지. 허허 어떠우? 내 얘기가, 사내 목숨이란 아주 귀한 것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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