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양화대교 돌아오는 날.
서해바다 돌아서 아라뱃길 을 지나가는데 고속도로 다리아래로 슬금슬금 지나가는 비암.
걸어서 지나가는 아주머니에게 뱀이 있다고 알려줬는데 그자리에서 멈추고 있다.
한강 갑문을 지나 행주대교 건너가는 길 가기전에 다리공사로 임시로 외곽도로를 가는데 또 뱀.
방화대교 지나서 난지캠핑장 지나 홍제천교를 지날때마다 우리의 아픈 역사가 생각납니다.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지 45일 만에 결국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호곡 소리가 가득한 산성을 뒤로하고 삼전도에 내려가 항복을 하고 만다. “천은이 망극하오이다” 하며 아홉 번이나 맨땅에 머리를 찧은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다고 전한다. 결국 청 태종은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함께 척화론의 주모자인 오달제, 윤집, 홍익한을 볼모로 삼아 심양으로 돌아갔다.
병자호란의 후유증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수많은 고아들이 생겨났고 청군이 철수하면서 끌고 간 50만 명에 달하는 조선 여성의 문제 또한 심각하였다. 그들이 여자들을 끌고 간 목적은 속가(贖價)를 받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싸도 1인당 25~30냥이었고, 대개는 150~250냥이었으며 비싼 경우에는 1,500냥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끌려간 사람들이 대부분 빈민이라 속가를 내고 찾아올 만한 처지가 못 되었다. 비싼 값을 치르고 아내와 딸을 되찾아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되돌아온 환향녀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한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 하여 이혼 문제가 조선의 정치,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또한 그 뒤부터 남의 남자와 잠을 잔 여자를 화냥년이라 부르게 되었다.
비록 두 달 남짓한 짧은 전쟁 기간이었으나 그 피해는 미증유의 국난이라고 일컬어지는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것이었고, 조선으로서는 일찍이 당해보지 못한 일대 굴욕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되었는데, 이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10년에 걸친 볼모 생활을 하다가 1645년(인조 23)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2개월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인조의 뒤를 이은 봉림대군, 즉 효종은 왕위에 오른 뒤 볼모 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재야인사를 발탁하고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군비를 확장하는 등 원대한 북벌 계획을 세웠으나 재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큰 결정을 하게되는데, 흰옷을 걸치고 홍제천을 건너면 환향녀를 면제해준다는 어처구니가 없는 행사를 실제로 합니다.
양화대교 건너 염창동 쉼터를 지나 아라뱃길로 이어지는 100키로쯤. ㅎㅎㅎㅎ
집에서 잘 산 하루의 마무리로 골뱅이를 듬뿍넣은 소면에 자기위로로 한잔합니다.
어디가서 주무하면 감질나게 조금씩 주는 그런것 말고. 조금 제값을 받더라도 몽땅 넣은 그런 소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