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종婢. 분을 팔며 늙어간 사연. 조구명쓰고. 최기숙옮김.
분 파는 할머니는 노비 출신이다. 젊어서는 얼굴이 곱상하고 자태가 아름다워서 뭇사내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하루는 이웃에 사는 남자가 마음을 고백하고 제발 마음만 받아 달라며 따라다녔다. 언뜻 본 눈길에 들어온 그 남자가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시장 판에 놓인 탐스러운 복숭아를 찔러 보듯, 길가는 강아지를 부르듯, 담장 밑에 핀 들꽃을 간단히 함부로 꺽듯 대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천한 노비였지만, 마음만은 옥돌처럼 단단하고 곱게 간직해온 터였다.
집안에 어느 정도 재산이 있어 눈으로 보고 듣는 것이 많았다. 예의범절 도 빠뜨리지 않고 몸에 익히고 있었다. 신분은 노예지만 마음만큼은 양가 규수가 부럽지 않다고 자부하던 터였다. 여종은 그 사내가 마음에 들어올 수록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역시 누구네 집 종인 것은 아니 분명했다. 똑같이 천한 처지지만 보고 배우며 살아온 것이 달랐다. 몇 번이나 뿌리치며 집으로 달려왔는데도 마음을 접지 않는 것을 보면 그저 쪼르르 달아나는 것만으로는 사내가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공연히 좋지 않은 소문이 파다 해져서 어쩔 수 없이 그 사람과 맺어지게 될까봐 두려웠다.
어느 날 여종이 심부름으로 길을 나섰다. 아까부터 머리꼭지가 당기는 것이 누군가 지켜보며 따라붙는 것 같았다. 과연 잰걸음으로 길 쫓던 사내가 여종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을 건넸다. 여 종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말했다.
" 제가 천하기 때문에 담을 넘고 구멍을 뚫고 오는 거라면, 죽어도 따를 수 없어요. 제겐 부모님이 계세요. 만일 저를 버리지 않으실 거라면 먼저 우리 부모님께 청혼해주세요. 부모님께서 허락해 주시면 일이 이루어질 거예요".
사내는 반색을 하고 물러나 며칠 뒤 폐백을 갖추어 여종의 집을 찾아갔다. 여종의 부모에게 공손이 인사를 올리고 따님을 주십사 청원했다. 사대부가의 예절까지는 아니어 더라도 여염집 정도는 예외는 될 거라고 생각하며 정성껏 예의를 갖추었다. 하지만 여종의 부모는 냉랭했다. 아무리 천한 노비라지만 궁색하고 가진 것 없는 다른 집 노비와는 다르게 키운 딸이었다. 불쑥 찾아온 사내는 외모가 반반한 것 말고는 무엇 하나 볼 것 없이 천하디 천한 노비였다. 여종 부모는 일언 지하에 거절했다. 두 말도 들어볼 것 없었다. 애지 중지 키운 딸을 그런 떡거머리 총각에 넘겨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내는 마음이 여리고 착했나 보다. 다른 대거리를 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가 앓아누웠다. 밥맛도 없었다. 일하러 나가지도 않았다. 사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는 그 길로 앓아누워 여종을 그리워하다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여종은 부모님께 꾸지람만 들었다. 처신을 어떻게 한 거냐고 혼이 났을뿐더러, 좋은 혼처를 정해 줄 테니 그 사내를 잊으라는 호통을 들었다. 여 종은 혼자서 애 태웠다. 자기 말만 듣고 예의를 갖추어 부모님을 찾아오느라사내가 마음 졸였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러던 중에 소문이 들렸다. 그 사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여종은 가슴이 철렁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메었다. 그대로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울음소리도 나지 않았다.
' 내가 그 남자를 죽였어. 내가 죽인 거야. 내 비록 내 몸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허락했는데, 이제 그 사람이 죽었다고 내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 그 사람이 나 때문에 죽었는데죽었는데 내가 배반하고 서 혼자서 즐겁게 산다는 건 말도 안 돼. 개, 돼지도 나를 더럽게 여길 거야. 여종은 혼자서 결심했다. 그리고 평생토록 시집가지 않았다. 여종은 연지와 분을 파는 것을 업으로 삼아서 늙도록 이리저리 돌아다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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