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봉산에서 운길산까지
바람결에 시(詩)가 흐르는 운길산.
몇 일 전부터 박범신 作 ‘고산자’라는 책을 보면서 仙人 김정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우리의 산하를 걸어서 수 놓듯 그려진 대동여지도. 산에 다녀본 사람만 느낄 수 있는 게 있다면, 뻔히 보이는 앞 고지일지라도 숫하게 길을 잃어 버린다는 것. 누군가의 손끝에서 그려진 지도는 수 많은 생명의 안내자가 되었을 것이고 고산자 역시 그 창조의 주춧돌이 되었음을 산에 다녀 본 사람이면 안다.
길을 안다는 것.
불 확실 한 현실에서 미래를 알고 간다는 것은 어둠이 가득한 밤 중에 횃불을 밝히고 가는 것과 같으리라.
팔당역에서 매서운 강바람이 사납게 할퀴듯 달려들어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출발을 한다. 굴다리를 지날 즈음해서 자리 잡은 포장마차에서 울려 퍼지는 노랫가락은 마치 동굴의 에코처럼 반향되어 마치 음악회라도 온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초입부터 가파른 경사로. 보기 좋은 전망을 준비하느라 급경사로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천천히 올라갈 때 길동무 한 분이 묻는다. 언니께서는 안 오셨는지요? 아, 윤여사요? 함께 산행신청 할 때까지는 좋았는데, 김장몸살에 시달리면서 바로 몇 일 전 산행으로 아예 들어 눕고 말았답니다. 그 놈의 김장이 뭔지? 2박 3일로 150여 포기와 씨름을 하더니 마음만 부자인 김장여행은 병원 행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려.
중턱에 걸쳐진 계단 참 쉼터에서 내려다 보이는 정경은 이제 막 걷혀가는 구름 사이로 갈라진 햇살에 양수리 굽이가 안개를 걷어내는 듯 신비롭게 보인다.
예봉산 정상(832m)에서 둘러본 서울. 금강산에서 흘러 왔다는 북한강과 충주댐을 거쳐왔다는 남한강의 물줄기가 섞이는 두물머리는 낮고 고즈넉하지만, 고개 돌려 서쪽에는 강이 보인다는 빈터마다 빼곡하게 들어선 아파트 촌. 마치 가을 날 비가 온 뒤의 국수 버섯 솟아있듯 중구난방으로 나열되어있다.
저기 저 곳에서 희로애락의 인간세상이 엮어진단 말이지요?
한강에 드물게 보이는 모래톱도 다 파내서 배가 다니게 한다니 앞으로 이런 풍경을 몇 번이나 더 불 수 있을 지도 의문입니다.
안내 표식이 있는 곳이면 한 편의 시를 매달아 바람결에 땀을 식히면서 잠시 추상에 젖게 만든 그 공노는 무엇으로 보답할꼬?
『…… 별일 없이 살아가는 뭇 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류시화님의 시를 읽다 보니 바람이 눈가를 스치웠는지 눈 꼬리에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작은 물방울이 맺힌다. 아! 세월이여! 어느새 비가 온다던 하늘은 비취 빛 청아한 청춘의 가슴 같다.
급할 것 없이 오늘의 코스는 10여 Km 정도야 쉬엄쉬엄 갑시다.
능선 타고 한 바퀴 돌면 적갑산(560m)을 지나 수종사로 내려가는 코스라 우측 분지처럼 생긴 안골을 끼고 좌우 산천을 둘러보면서 지나가는 길이 물푸레 나무 군락지라 하나 잎새 다 떨어진 나목들의 군상을 둘러도 보고, 스모그 때문에 선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수봉과 북한산의 빼어난 바위의 위용도 보고 언젠가는 등산을 마치고 서쪽 아스라하게 보이는 인천까지 뱃길로 집에 가는 날도 오지 않을까 하는 농담도 남기면서 걷는다.
좀 이른 시간이지만, 모두 모여 점심식사까지 마치고 다시 행장을 추슬러서 콧노래도 흥겨웁게 다시 시작된 산행. 가다 보니 어느 팀인지 버너에 라면을 끓이면서 흥분된 목소리가 큰 소리로 들린다.
……엄홍길씨가 본 부인하고 이혼을 했다니까욧! 오호 그런 일이 있었나? 그런데 이 산중에 마음을 비우러 와서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지요? 그런데 그 말은 맞나 하고 동행인에게 물으니 내용도 모르고 남의 사생활 관심도 없단다. 몇 일 전에 본 공지영 님의 즐거운 나의 집에서는 성이 다른 아이 셋을 데리고 산다고 써 있던데, 남의 애기가 그리도 재미있는지요?
구름이 가다가 산에 걸려서 멈춘다는 운길산(610m) 가는 길에 물어보니 마주치는 산객이 푹 내려갔다가 푹 올라가면 운길산 정상이 나온다고 한다. 그러면서 예봉산 길을 묻자 이방인이 대답한다. 푹 내려갔다가 푹 올라가는 길을 몇 번 만 거치면 됩니다. 그 길로 쭉 가시지요!
산행 중에 까만 중개를 데리고 온 산객이 동행이 되어 함께 가는데, 사람들 사이에 뛰어다니다가 계단만 나오면 힘들어서 그런지 습관이 그렇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딱 버티고 안 간다. 안고 올라가라는 신호. 조금 지나면서 보니까 계단인데, 돌에다 핀을 박아서 만든 계단이 나온다 아하! 이런 계단은 올라갈 수 가 없겠구나.
운길산 정상에 도착. 살인미소로 기념사진 한 장 남기고 후미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지나온 길목마다 동동주 파는 사람들이 더러 있고, 짝퉁 막걸리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한다. 막걸리 좋지! 그런데 힘들게 산 정상까지 들고 올라온 것은 좋은 데 양심까지 팔지는 맙시다.
이제는 하산 길. 수종사 방면으로 길을 잡아 내려서는데, 늦은 점심을 해결하려는 산객들의 왁자한 소리가 많은 인원만큼 시끌시끌하다.
김유진 님의 시 앞에 머문다.『나무 타는 향내와……기분 좋게 불어오는 미풍은……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어루만지는 산들거림은 감감소식인 친구가 부르는 손짓 같았다.』나를 두고 하는 소린가 싶어 다시 읽는다.
낙엽 가득한 등산로를 제대로 즐기려면 바스락 이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마음을 열어야 하거늘 쫓기듯 내려서는 발걸음이 여우마저 몰아댄다.
세종때 동굴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종을 치는 듯해서 이름 지었다는 수종사에 도착. 우리나라 사찰 중에 전망이 제일 간다는 터에 자리잡은 모양새에 그때 심었다는 은행나무 고목은 그 위용도 우람하거니와 그 한 켠에 장약용 님의 시. 치마폭에 매화를 그리다 라는 걸 술값이 떨어지셨나? 왠 치마 폭 하고 보니, 치마 폭에 그린 매화가 하도 참인 듯 해서 꽃 향기가 퍼져 새가 날아와 가정을 이루고 열매도 주렁주렁 열려 행복하게 살라는 숨은 뜻이 깊다. 하긴 그 똑똑하고 열심히 공부한 형제들이 모두 귀양가서 한 평생을 보냈으니 이런 생각이 들 법도 하다는 공감을 하고 잣나무 그득한 솔밭 길을 따라 국수집으로 행한다.
그런데, 운길산 정상에 쉬어간다는 구름과는 어떤 대화를 나누셨는지요?